“언젠가 할머니께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풍경 하나를 말씀해주셨죠. 두 눈을 질끈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풍경이 지금도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다면서요.”
2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206: 사라지지 않는>은 허철녕 감독이 쓰고 직접 읽는 편지로 시작한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담은 <밀양, 반가운 손님>에서 인연 맺고 <말해의 사계절>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김말해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다. 허 감독은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취재하다 김말해 할머니한테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으로 세상을 떠나 주검도 찾지 못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206: 사라지지 않는>은 김말해 할머니의 남편처럼 한국전쟁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전후까지 이어진 이념전쟁 때문에 시신도 찾을 수 없었던 민간인들의 유해를 찾아 나선 시민들의 이야기다. 206은 인체를 구성하는 뼈의 개수로 뼛조각마저 온전하게 찾을 수 없는 학살 피해자들의 비극을 담은 제목이다.
인류학자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안경호, 홍수정, 노용석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과 유해발굴팀장, 임영순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등은 유족, 자원봉사자들과 2014년 시민발굴단을 만들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조사에 나선다. 이들이 시민발굴단으로 나선 이유는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 해체되면서 가까스로 세상 밖에 나올 뻔한 피해자들의 진실이 다시 묻혔기 때문이다. 허 감독은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으로 국가의 지원 없이 유해 발굴에 나선이들의 노력과 염원을 2018년부터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영화가 4년 동안 담은 6곳의 유해발굴 현장 가운데 가장 참혹한 곳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이다. 3일 동안 땅을 파도 파도 흔적을 찾기 힘들어 철수하기 직전 쏟아져 나온 유해의 80% 이상이 여성이었고 어린이들의 유해도 60구 가까이 나왔다. 특히 이곳에서는 인체 뼈 가운데도 부식이 빨리 된다는 늑골, 그것도 어린아이들의 늑골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조사 결과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들이 아이들을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분석됐다.
2018년 5월 열린 설화산 사건 유해안치식에서 80일간 헌신적으로 발굴작업을 함께 했지만 아버지의 유해를 끝내 찾지 못한 유족 김광욱씨의 눈물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의 유해를 찾아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라고 흐느끼는 박선주 교수의 말에서 끝나지 않는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은 이념과 명분이 아닌 피해 유족들의 고통을 보살피는 데서 시작돼야 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206:사라지지 않는>에서 국가의 지원없이 헌신적으로 학살피해자 유해 발굴 작업에 나선 현장 인력들. 찬란 제공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찬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