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한국문화인류학회 편, 한경구·정병호·유철인·김은실·김현미·홍석준 지음, 일조각, 1998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사실 그녀와 비슷한 여성들, 적지 않다. 갑질도 성별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이 의원의 행태는 여성성의 일종으로 학문적 분석을 요하는 문제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그냥이란 말’(<한겨레21> 1171호)은 내게 해방감을 주었다.
‘가사노동의 연장으로서 학교 급식 노동’에 대한 편견만큼 강력한 남성의 언어도 없을 것이다. 취업, 계층, 비혼 여부를 불문하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오늘은 또 뭐 하나’를 고민한다. 대개 남성들은 평생 식사 준비로부터 자유롭다. 오죽하면 남성들이 모여 삼시 세끼 준비만으로 하루를 보내는 내용이 티브이(TV) 프로그램이 되겠는가.
여름에 좁은 공간에서 자녀들과 부대끼면서 밥을 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회사 근무, 남의 끼니, 육아, 빨래, 청소, 공부 등 이 모든 일을 하루에 다 한다. 밥벌이도 힘들고 밥하기도 힘들지만, 분명한 현실은 대부분의 여성은 두 가지 노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펴낸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는 내가 읽은 분과 학문 개론서 중에서 가장 짜임새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구성과 편역, 집필, 다양하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이미 스테디셀러다. 2부(사람다움, 남자다움, 여자다움) 중 4장 ‘성과 문화’ 편에 흥미로운 사례가 나온다.
밥하는 사람의 지위는 사회마다 다르다. 남성이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그들에게 좋기만 할까. 브라질 중부의 보로로(Bororo) 사회에서는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특히 남성이 요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결혼한 남자만이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따라서 미혼 남성은 언제나 야윈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영양실조로 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당연히 여긴다(김은실, 74쪽).
성별에 따른 사회적 규범(성역할 고정 관념=성별 혹은 성차별)은 화장실 사용에서부터 죽음(살인, 자살)의 의미까지 다양하다. 다시 말해, 젠더는 인간 생활 전 영역에 걸쳐 있다. 보로로 사회는 남성이 스스로 음식을 해먹고 싶어도 이에 대한 강력한 규제 때문에 밥을 못 먹고 굶어죽는다. 젠더 규범은 여성에게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하다. 같은 책에 나오는 지참금을 적게 가져왔다고 신부를 불태워 살해하는(bride burning) 관습이 그것이다(김현미, 102쪽).
지금 한국 사회의 저출산은 여성의 결혼 기피 결과다.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남성과 결혼하느니 ‘고양이와 살겠다’는 것이다. 한국 남성의 집밥에 대한 ‘환장’(換腸)과 ‘혼밥’ 문화는 보로로 마을의 소프트(?) 버전으로 보인다.
이언주 의원에게 세상은 두 개뿐이다. 자기처럼 ‘밥벌이’ 하는 사람과 ‘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밥하는 사람,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아줌마’가 파업을 하다니! 혹시 그녀의 짜증과 분노는 자기모순 때문이 아닐까. 서두에 여성성에 대해 썼지만, 여성성과 남성성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남성성이 여성성을 규정하거나 상호 보충한다.
대개 갑질은 무지와 무안무치에서 나오는데 불안이 겹쳐 보인다는 인상, 나뿐만일까. ‘여성’과 ‘남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의원이 자신을 밥하는 여성으로 생각할 리는 없고, 그렇다면 밥벌이라도 잘해야 하는데 본인이 국민의 세금을 받을 만한 ‘일꾼’이라는 확신도 없는 듯하다. 명예남성 여성의 계급 혐오와 여성 혐오. 혐오는 본디, 발화자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밥벌이는 저절로 밥이 되지 않는다. ‘돈’과 ‘밥’은 사랑, 권력, 소명 등 다양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고 밥은 그 연결 과정의 산물이다. 빵과 장미가 아니라 빵을 만드는 과정이 장미다.
빈곤 외에도 사람이 굶는 이유는 다양하다. 밥벌이로 시간이 없어서, 더워서, 귀찮아서, 내 일이 아니어서, 이언주 의원 같은 사람이 있어서…. 밥벌이와 밥하기 노동의 위계가 큰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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