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서울시 마포구 인근에는 대형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 카페들이 많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모차르트가 흐른다. 감독 보 비더버그도 유명하지만 아들인 배우 요한 비더버그의 <아름다운 청춘>도 눈부시다. 주인공 세 사람을 생각하면서 영화 속에 빠져 있다가…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책만 읽으면서 살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니, 심란해서 바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쓰지 않으면 다른 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게 써봤자, 포도송이처럼 징그러운 악플만 주렁주렁. 더구나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는 분야가 있다. 바로 내부 비판이다(나의 경우 여성주의나 출판계).
사회가 좋아지는 길은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뿐이다. 특히 양식있는 출판 종사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출판 편집자의 안목이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야말로 뛰어난 지식인, 오피니언 리더(여야 한)다. 책 내용을 볼 수 없는 온라인 서점이 대세가 되면서 제목과 작가의 이름값이 산업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제 책은 쓰여지기보다 기획되고, 편집자는 카피라이터를 겸업한다.
유치하고 노골적인 제목이 넘쳐난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나왔을 때 엄청 웃었다. 이 정도면 소박하다. 착한 척에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내용 없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엇보다 이 책은 얕지 않다. ‘지적 대화’를 보장한다니! 하얀 거짓말의 진정성까지 갖추었다.
내용이 좋으면 상업적인 제목이든 뭐든 문제가 없다. 진짜 골치는 상업적인 의도와 무지가 겹쳐,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제목이다. 발명 수준의 오역 에피소드를 모으면, 책 한 권은 쉽게 나올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다. 원제는 그냥 ‘일본의 미소지니’였는데,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출간되었다(<성차별(혹은 여성을 싫어함): 일본의 미소지니>(女ぎらい: ニッポンのミソジニ-)). 일본 문화의 장점은 용어의 맥락을 이해하고 외래어를 굳이 번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소지니(misogyny)를 직역하면 여성혐오다. 서구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단어다. 사회마다 성차별의 작동 방식은 다르다. 혐오(hate, disgust)가 강한 사회, 여성의 이중노동을 사회진출로 오해하는 사회, 여아 낙태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살해하는 사회… 미소지니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 마녀사냥, 유대/이슬람과의 갈등, 정신분석학 등 이원론(二元論)에 기반을 둔 단어다. 일본 사회의 성차별은 서구와 다르다(천황제 편을 보라).
한국어의 혐오(嫌惡)는 어감이 지나치게 세다. 미소지니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남존여비’ 정도가 적절하다고 본다. 사회마다 가부장제의 성격도 다르고 ‘여성’의 의미도 다르다. 모든 언어에는 자기 주소가 있다. 말이 탄생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그것이다.
이 책은 제목 덕분에 여성학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제대로였다면 팔렸을까? 누가 일본의 미소지니에 관심이 있겠는가. 그 결과 한국 남성의 반발은 대단했다. “여혐? 여성은 남혐 안 하냐?” 여혐과 남혐은 같은 말이 되었다. 계급, 젠더, 인종 차별의 구조는 다르지만 이는 모두 지배, 피지배 관계다. 약자와 강자는 대당(對當)의 위치에 설 수 없다.
인간을 남녀로 구분하는 사고는 가부장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이 그런 줄 안다. 페미니즘은 차별보다 차이를 고안해내는 권력에 주목한다. 차이는 차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남성의 ‘남혐’ 주장 덕분에 지난 30년간 여성운동의 성과는 사라지고, 여성들은 성차별이 있음을 증명해야 할 처지다.
여성학에서 우에노는 하루키와 비슷하다. 소설과 여성학은 다르므로 하루키를 문제화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일본’의 페미니스트다. 당장 군 위안부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서구 이론을 일어로 이해한 그녀가 왜 한국에서 그토록 읽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금, 구한말인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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