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아만자 1· 2>, 김보통 지음(글·그림), 예담, 2014
통증은 소통이 어려운 영역이다. 결국 내가 아파 봐야 남 사정도 안다. 윤리나 정의감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동병(同病)만한 언어가 없다. 그러다 보면 경험 여부를 따지고 불행을 경쟁하게 된다. 그다음 단계는 인간의 가장 비참한 모습 중 하나인, 타인의 고통과 비교하면서 위로받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가(죄의식)에 비해 효과(위안)가 크다. ‘가성비’….
고된 하루. 나는 오늘도 고통을 잊으려고 어느 포털사이트의 미아 찾기 기사를 읽는다. “네 살 여아, 거리에서 실종, 현재 스물네 살.” 그 부모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다시 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타인과 비교가 아니라 내 안에서 변화를 찾자. 고통을 다룰 능력을 기르자! 이를테면 클라이브 스테이플스(C. S.) 루이스의 “지금 고통은 그때 행복의 일부이다(The pain now is part of the happiness then).”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만 ‘죽을 만큼’ 아픈 상태가 아니라 실제 ‘죽기 위해서’ 아픈 말기 암환자에게 이 말이 들릴까. 작가 김보통의 <아만자>(암환자)는 스물여섯에 위암이 척추까지 전이된 말기 암환자 청년의 일상을 그린다. 문체도 그림도 담백하지만, 폭발적으로 눈물이 나다가 다시 담담해진다.
암, 누구나 걸릴 수 있다. 정말 ‘보통의 경험’이다(동명의 성폭력 관련서가 있다).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 평소에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막상 돈이 없다는 이유로 죽는 상황이 오면, 인류는 이제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는 근본적인 역사의식(분노)이 든다.
흔한 대화. “환자분, 통증이 1부터 10까지로 쳤을 때 어느 정도 아프세요?” 고통을 수량화한 척도(尺度) 질문인데, 고통이 계량화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은 필요하지만 환자를 위한 말이 아니라 치료자를 위한 것이다.
<아만자>의 주인공은 간호사가 묻자,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아, 하느님, 상제님, 부처님. 제발. 죽여주세요.) 백이라고 이 씨××아!”(1권 140쪽) 유머와 기품이 어우러진 이 책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욕설이다. 얼마나 아파야 생목숨이 사라지겠는가.
인간 행동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 육체적 고통(pain)이란 이런 것이다. 이 권력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고문은 최고의 악이다. 고문은 국가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도처에 고문이 있다.
동물도 자살하는가? 한다! “자살은 엄청난 ‘인간적 고뇌’가 있는 매우 고차원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물들의 보편적인 습성이 아닐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돌고래의 떼죽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 위기 상황에서 기절해버리는 염소처럼. 개체가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 선택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라고 생각해.”(2권 34장)
내게 가장 꽂힌 말, “하나도 안 궁금해. 내 인생.” 누구나 이럴 때가 있지만 지속되면 살 수 없다. 생명의 보편적 습성이다. 여전히 자살을 정신력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야 가능한 인식이다.
보들레르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잠이 드는 것의 피곤함과 깨어나는 것의 피곤함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2권 189쪽) 시인이니까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인생 많다.
삶이 생사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생·노·병·사다. 시간은 나이 듦과 병듦으로 채워진다. 이 책을 읽은 암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작가에게 말했다고 한다.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전해달라.”
누구나 아프고 죽는다. 슬프고 두려운 것은 ‘인간’이어서 그렇다. 인간은 의미 중독자다. ‘자연’이라면 순리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안도감이 아니라 의료보험 개혁뿐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아픈 사람을 루저로 대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자연에서 다시 만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