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M. C. 에셔, 무한의 공간〉, M. C. 에셔 외 지음, 김유경 옮김, 다빈치, 2004
법무법인 ‘다율’ 소속의 어느 여성 변호사(전 군법무관)는 지난 6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대에는 비밀이 없다. 자살, 성폭력 모두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 외부에 노출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강사(정희진)가 말한 (군대 내 성폭력) 사례는 말이 안 된다. 나는 (여성 문제를) 다 안다.” “밥하는 아줌마”를 비난한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과 막말 대결을 하면 누가 이길까.
내가 여성가족부 소속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전문강사 재교육에 갔다가 겪은 일이다. 일부 남성들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이런 분이 여성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우려스러운 점은 그녀의 인식으로 보아 자신이 군에서 “20년간 처리했다”는 사건들의 은폐, 조작 가능성이다.
그녀는 “나는 여성도 군인도 아닌 직업인이다”라고 말했는데, 국방부 근무 경력과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녀가 주장하는 팩트의 근거인 듯했다. 급기야는 “군대 갔다 왔어요?”라고 나를 힐난했다. 가정폭력 부부를 상담할 때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경험자가 제일 잘 안다는 것이다. 내가 피해 여성의 편을 든 것도 아닌데 구타 남편은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 “모르면 가만있어! 당신, 우리 집(폭력 현장)에 없었잖아!”
팩트 전쟁, ‘포스트 트루스’ 시대다. 경험은 저절로 팩트가 되는가. 백인 남성의 말은 왜 그토록 권위를 갖는가. 논문은 팩트고 에스엔에스(SNS) 글은 아닌가. 증언은 자의적이고 문서는 확실한 사료인가. 팩트, 지식, 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경험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당사자주의가 아니라 담론이 생산되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에 관한 탐구이다. 팩트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팩트라는 근대적 객관성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현상학, 후기구조주의, 탈식민주의 등)의 답은 같다. 말하는 너는 누구인가,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라(=성찰). 팩트는 발화자만의 진실, 그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발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팩트는 의미가 없다.
네덜란드의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 네덜란드 발음으로 ‘에스허르’)에게 수학, 미술, 인문학, 근대성은 같은 의미였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에셔에게 영혼을 팔았다. 에셔가 직접 쓴 편지와 작품 해설로 이루어진 〈M. C. 에셔, 무한의 공간〉은 나의 ‘정전’(正典)이자 위안이다. ‘뫼비우스의 띠 Ⅰ, Ⅱ’(104~105쪽), ‘도마뱀’(76쪽), ‘반사구(反射球)를 들고 있는 손’(96쪽)을 보라.
팩트 정치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작품, ‘손을 그리는 손’(Drawing Hands). 최근 우병우씨 수사와 관련해 패러디될 만큼(우병우를 수사하는 우병우 사단)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내 손을 그리는 내 손? 그렇다면 그리는 손이 내 손인가, 그려진 손이 내 손인가. 비슷한 이야기로 존 휴스 감독의 영화,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이 있다.
에셔에 대한 일반적인 키워드는 기하학, 초현실주의, 가상 세계, 그래픽디자인 시조 등인데 모두 작가와 대상의 관계에서 파생된 주제들이다. 에셔가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술가와 작품 사이의 무간(無間)과 자기 경계의 카오스를 형상화했다.
재현은 나와 대상의 관계, 사회와 권력의 지도를 고민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체(나)와 대상(너, 세계)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재현은 혼란과 분열을 동반한다. 에셔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나를 바로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23쪽). 흔들림은 정치, 윤리, 미학의 출발이다. 흔들려야 하지만 지나치게 흔들리고 싶지는 않다. 자기 경험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대. 이것은 사유의 종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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