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정결한 집>, 정찬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3
해 질 녘, 외로운 병사가 부는 트럼펫의 저음. 프레드 지네만 감독의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젖은 눈으로 트럼펫을 분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한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운명이다. 소설가 정찬의 <정결한 집>(2013)에는 여덟 편의 운명이 있다. 언어, 권력, 죽음에 대해 이만큼 단단한 텍스트가 있을까. 이 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주인공은 침팬지의 트럼펫 소리에 생명을 얻는다. “휑하니 빈 늦가을 들판은 쓸쓸했습니다. (…) 오른손이 어느덧 총을 쥐고 있었습니다. 총의 감촉이 차가웠습니다…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데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 트럼펫 소리였습니다… 방아쇠 당기는 것을 잊은 채 트럼펫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239쪽) 아름다움이란 경탄이 아니라 눈물겨운 것이다.
맞다. 이 작품은 연극배우 추송웅의 유명한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동명이고 내용도 연동한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지 않을까. 정찬의 작품이 훨씬 좋다. 카프카에 대한 대개의 해석,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고독한 개인’(누가 소외?)은 제국주의자 카뮈의 입장을 베낀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인종 학살로 막을 열었다. 침팬지(정찬)든 원숭이(카프카)든,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마취총을 맞고 철창에 갇힌 채 망망대해에 던져졌다. 어느 날 갑자기 사냥당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카프카의 <변신>과 <학술원…>은 유대인이라는 작가의 인종적 조건의 산물, 즉 자신의 몸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근대의 휴머니즘의 주체는 백인 남성이다. 여성과 유색인은 예외다. 백인 남성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규범은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불쾌감을 안겼다. 이들이 이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이고, 흑인은 인간과 동물의 중간’이라는 ‘진화론’이었다. 이때부터 인간과 가까운 종인 유인원 연구는 근대과학의 총아로 떠오른다.
정찬의 작품에서 침팬지는 인간이 아닌데도 언어를 구사하고 급기야 저명한 언어학자들을 가르친다.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 구사는 인간이냐 침팬지냐,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한 유기체(노예, 여성)에게 유리한 능력이다. 내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거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찬의 언어를 내 식대로 쓰면, 여성이 영혼의 분열을 겪지 않는 유일한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여성의 시간이 뒤섞일 때다. 즉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생명을 마취총으로 쏘아 포획하는 그 감각을 언어라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철창에 갇힌 빨간 피터에게 가장 큰 고통은 출구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 문제는 출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무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출구를 자유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유를 원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즐겨 쓰는 자유라는 말에 경멸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231쪽)
철창의 피터에게 출구는 언어였다. 말은 자기 인식으로 가는 길이지 자유의 도구가 아니다. 자유? 그런 것은 없다. 없는 현실인데 언어가 현실을 만들어낸 경우다. 가능하지 않은 자유를 행하는 자들의 권력을 분석할 언어가 절실하다.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탁현민씨 공저 제목)는 일부 한국 남성의 폭력 문화이고, 카프카와 정찬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이에 대한 고뇌, 고통의 언어다. 시국을 덧붙인다면, 나는 탁현민씨 비판(6월3일·10일 칼럼)을 후회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는 나의 존엄을 위해 자살해야 했다. 작품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절감할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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