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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서울대

등록 2017-06-30 20:02수정 2017-06-30 20:5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서울대의 나라>, 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1996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다. 문단에서도 “독특하고 치열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몇 년 전 온라인 서점으로부터 그를 ‘소개’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원고지 40매. 주제에 따라서는 하루 분량인데, 여름 두 달을 꼬박 매달렸다. 나중에는 정신 붕괴 증세가 왔다. 읽은 작품과 관련 분석서 50여권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결국 ‘팬레터’를 보내고 말았다. 최소한 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저지른 만용. 40년 동안 쉼 없이 소설을 써온, 국어교육 전공에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작가에게 ‘첨삭 지도’를 요청한 것이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반쯤 죽어 있었다. 답장이 왔다. 한 줄.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내 글) → “두려운 일인가로 고쳐주세요”. 그렇다. 글쓰기는 두렵고 힘겹고 어려운 노동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한때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생면부지의 ‘유명 인사’ 몇몇을 죽도록 미워한 적이 있다. 강의할 때도 비판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도 비판하는 이들이긴 했다. 하지만 나의 집착과 증오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나는 왜 그들을 그토록 싫어하는가. 미워하는 일도 중노동인지라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겨우 깨달았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식하고 비윤리적이며 탐욕스러운’ 인간인데, 인정받고 잘 살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쉽게’ 살고 싶었다. 아니, 나도 그런 사람인데 그들처럼 뻔뻔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받는 게 억울했다.

고대하던 새 정부가 탄생한 지 50일이 되어간다. 그동안 매일 등장하는 ‘사실’과 스스로의 자기 검열로 다시 쓰거나 폐기한 글이 네 종류, 100매가량이다. 이번 글도 원래는 안경환씨 아들의 학생부종합전형 서울대 합격과 학벌 세습을 소재로, 세 가지 버전으로 썼었는데 모두 포기했다.

그래서 아예 이러한 상황에 대해 쓰기로 했다. 나는 예전처럼 성별 권력관계, 메타 젠더에 관한 글을 써왔는데 사람들은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고 비판한다. 사회적·성적 검열에, 자기 검열까지. 글을 쓸 수가 없다. 비판은 비난이 아니다. 개입하는 실천이다. 대다수 국민들처럼 나도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국민으로서 걱정되고 여성으로서 항의하는 일이 왜 “자유한국당을 도와주는 일”이고 “노무현 시절의 조중동 행태”인가.

내 문제는 이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고민하고 조사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좋아, 하지만 쓰지 마” “한국 사회에서 넌 이미 존재 자체가 비호감(페미니스트)이야, 그러니 조심해야 돼” “그냥 고전을 써”…. 나는 이중적인데다 망상에 빠져 있다. 지적이고 우아하게 보이면서도, 내 진짜 생각을 적나라하게 쓰고 싶지만 미움은 받고 싶지 않다. 야밤에 집에 있는 글쓰기 책들을 다 뒤졌다. 글쓰기의 핵심인 윤리학과 정치학을 다룬 책은 없었다.

‘남성, 미국 박사, 국립대 교수’ 강준만이라고 해서, 저절로 성역과 금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각오했고 노력했다. 1996년에 출간된 <서울대의 나라>는 나의 ‘강준만 입문서’였다.

이 책은 많은 오해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는 서울대 폐지론이 아니라 축소와 소수 정예를 주장했다. 한국의 ‘엘리트 시장’에 비해 서울대 졸업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274쪽).

엘리트? 특정 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우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력은 개인차다. 그마저도 부모의 능력이 좌우하는 세상이다. 만성 실업의 시대에 당대 자본주의는 대학의 위상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나는 인문학을 제외한 대학 자체의 폐지론자다. 이미 대학은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으니 주장할 필요도 없지만 ‘부수적 피해’는 너무나 크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서울대’는 글쓰기 정치의 상징이다. “비판은 적당하게,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주제는 깊이 다루지 않고, 나의 연줄을 건드릴 수 있는 내용은 삼가야 한다”(5쪽). 20년 전 강준만이 한 비판인데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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