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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어떤 메모] 러브리스 모성, 러브리스 섹스

등록 2017-04-21 20:30수정 2017-04-21 20:3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어머니를 떠나기에 좋은 나이>, 이수경 지음, 강, 2017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앨프리드 디수자) 지난주 이 문구를 ‘호남’과 ‘민주당’의 관계에 적용, 분석하려고 했는데 포기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썼었다. 며칠 후 이수경의 작품에서 다시 마주쳤다. “…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사랑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여러 번 상처받은 것처럼 사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여러 번 상처받는 것처럼 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244쪽) 정말, 어떤 것일까?

소설가 이수경의 <어머니를 떠나기에 좋은 나이>(표제작)를 보고 “떠나보내기에”로 잘못 읽었다. 내가 엄마를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도 설정하지 않은 삶이다. 엄마는 6년 전에 죽었지만 나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내 곁에 있고 나는 그녀의 의중을 살핀다. “엄마, 매일매일 보고 싶어요. 심장이 뛸 때마다 보고 싶어요.”

이 책은 여덟 편의 빼어난 단편들이 서로 기대고 있는 제18회 무영(無影)문학상 수상작이다. 작품을 읽고 한동안 마음의 난(亂)을 겪은 나는 여전히 어지럽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병훈의 능력을 빌린다. 그는 이수경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렇게 썼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 괜찮은데, 안 괜찮은 인생.” 이에 더해 작가의 문체는 내 비록 과독(寡讀)이지만, 자주 접하지 못한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단정하다 못해 ‘정숙’한 지경에, 깊은 상흔이 어른거리는데 따뜻하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내가 행복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 같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자 소설집 전체의 원형(原形)을 이루는 ‘가위바위보’의 ‘나’처럼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보듬는다. 내 인생을 잘라버린 날카로운 가위와 바로 눈앞에서 굴러오는 운명의 바위에 깔려 있지만, 그래도 상처받은 사람과 같이 덮을 수 있는 포대기(보, 褓)를 놓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눈물 때문에 내 눈에 어리는 달은 자꾸만 기울고 있는데.”(35쪽)

나는 표제작의 일격으로 주저앉았다. 작품의 외양은 “맹렬하고 사나운 정사” 꿈꾸었으나 어머니의 다락에 갇힌 마흔아홉의 여자와 “내가 연하라서 많이 놀라셨습니까”라고 말하는 여섯 살 아래의 남자 마이클의 이야기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러 휴가를 내고 미국에서 날아왔다.

“… 안전하고, 반듯하고, 항상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고, 원칙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이라고 세뇌시킨 어머니를 완전하게 배반할 수만 있다면… (중략) 나머지는 다 죄악이라고 강박관념을 심어준 어머니를 내 안에서 온전하게 버릴 수만 있다면 러브리스 섹스인들 못하겠는가. 러브리스 모성도 있는데 그까짓 러브리스 섹스가 무슨 대수겠는가.”(254쪽)

러브리스 모성, 러브리스 섹스. 섹스는 모르겠고, 모성은 여성의 성역할이지 자연스러운 사랑이 아니다. 내 처지가 작품과 같지는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분리통치 당한 모녀의 상투적인 이야기다. 내가 어떻게 1938년생 여자(엄마)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었겠는가. 다만 나는 착한 척함으로써 앞서 태어난 여자들을 제치고 ‘앞서가는’ 죄의식을 씻으려고 했다.

엄마는 내가 공부(언어)에 욕망이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했고, 동시에 자기처럼 포기할까봐 불만이었다. 죽을 때까지 딸에게 ‘이중 메시지’ 던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녀의 무거운 몸을 어깨에 짊어지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고 싶지 않다. 어차피 딸은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를 조종하려다가 실패한 ‘어머니’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인생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작가처럼 암 4기 진단을 받았던 사람, 호텔 미니바의 맥주를 못 마시는 사람,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이클’을 기다리는 사람, 밤에 전화할 곳이 없는 사람, 취약한 사람에게 끌리는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위로란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임을 배울 수 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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