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밤>, 최인호 외 지음, ’82 제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82
올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Moonlight)>를 보았다. 이 영화를 “흑인 동성애자 소년의 성장담”이라고 요약한다면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영화는 음악과 영상으로 말한다. “달빛 아래 흑인 소년의 모습은 푸르게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과 그가 직접 각색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5)이 생각났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르다. 결국 <문라이트>까지, 세 텍스트의 줄거리는 공통점이 없다.
<깊고 푸른 밤>은 1982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작품의 배경은 미국 서부의 해안 도로를 운전하는 두 남자다.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심사평으로 소개를 대신하면 “도시 문명 속에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 “세련된 문장”, “70년대적 정서의 대마초 가수의 아픔과 방황” 등이다.
최인호. <상도(商道)>부터 그는 내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지만, <깊고 푸른 밤>은 절정의 최인호다. 단편의 백미다. 앞서 말한 대로 세 텍스트의 내용은 비슷한 점이 없지만,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공유한다. 이들의 외로움에는 깊고 푸른 밤(deep blue night)이라는 형상이 있다. 고도가 높은 북미 대륙의 밤하늘은 깜깜하기보다 높고 푸르다. <문라이트>를 보고 <깊고 푸른 밤>이 떠오른 것은 소설에서 영화의 심정이 담긴 문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때, 최인호에게 열광한 덕분이다. 나는 이 구절을 좋아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여행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웬만큼 돌아다닌 이들도 낯설고 먼 곳에 가면, ‘죽기 전에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여행을 떠나고 나서부터 아름다운 풍경이나 거대한 사막, 선인장, 눈 덮인 요세미티 공원의 절경을 볼 때면 그런 감상적인 비애를 느끼곤 했었다(한 문단 띄고- 원작).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13쪽)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 표현은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서, 의미의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은 두 번 찾아오지 않고 동일한 경험도 없다. 사람이든 장소든 다시 찾아갔다가 상처받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 여길 또 오겠냐,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이 싫다. 한 번을 즐기는 것이 삶이지, 내가 거기 있었음을 알지 못하면서 인증하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랴. 사진은 영원히 간직하는 기억이 아니라 한 번도 못 간 여행이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요세미티 공원을 여러 번 여행한 한국인은 많지 않다. <깊고 푸른 밤>의 식당은 이런 곳이다. “미국의 도시는 어느 도시건 같다… 같은 빌딩과 같은 고속도로와… 동일한 이름의 햄버거 집, 거대한 체인 스토아. 같은 얼굴,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갖고 있다.”(22쪽, 원문 그대로 표기)
반면, <문라이트>에서 두 남자가 만나는 평범한 식당은 인생이 집약된 장소다. 영화가 끝날 즈음 주인공은 “처음 나를 만져준”, 그러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에게 고백한다. 존재의 의미였고, 살아‘남을 수 있게’ 했으며, 평생 그리웠던 사람. 그러나 그의 마음은 내 마음 같지 않다. 마지막이다. 멀리서 왔지만 잠깐 만나고 영원히 헤어질 것이다. 그 순간을 붙잡으려는 몸짓조차 고작 눈물과 어깨동무처럼 보이는 어색한 포옹이다. 만나는 시간에도 외롭고 그립다.
사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매순간이 마지막이다. 마지막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의미 없이도 살 수 없다. 의미의 극점은 사랑과 이별. ‘개싸움 혹은 루저의 운명’뿐인 이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에겐 시간을 지속시켜줄 현실의 중력, 끈이 절실하다. <문라이트>는 그 끈을 놓는 장면이고, 최인호는 너무 지쳐서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은 남자를 그린다. 모두 깊고 푸른 밤에 일어난 일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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