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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시시한 인생

등록 2017-03-10 20:48수정 2017-03-10 22:1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16

“나의 명상은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붓을 들어 쓰려고 하면 쓸거리는 무진장 있는 것 같고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머뭇거리다 보면 더 이상 무얼 쓰건 시시하다는 태평스러운 생각도 일었다. 잠시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이번엔 지금껏 써 온 것들이 전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어째서 그런 걸 썼을까, 하는 모순이 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113쪽)

‘나쓰메 소세키’가 아니더라도 글쓰기가 생업인 사람들에게는 공감 이상의 구절일 것이다. 써야 하는데 안 써진다. 자판 앞에 앉아만 있다. 글자 없는 화면에 혼자 깜박거리는 커서(cursor)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급한 이들은 몽쉘통통 같은 ‘울트라 슈퍼 당(糖)’을 먹어가며 어떻게든 면을 메우거나, 시간이 지나면 ‘글은 써서 무엇하리’라며 드러눕는다. 물론 그렇게 쓴 글은 소용이 없고, 포기해봤자 할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것이 무슨 의미랴. 살아 뭐하나. 만사가 시시하다. 생계만 아니라면 이 외롭고 지겨운 노동, 그만하고 싶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유리문 안에서(硝子戶の中)>는 그가 사망하기 일년 전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산문이다. 2008년에 출간된 번역본의 부제는 ‘최후의 산문집’이었는데, 이번에는 ‘마음 수필’이다. 번역자의 문체도 한몫했겠지만 대가의 ‘최후의 마음’이 느껴진다. 딱히 슬픈 글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안쓰럽다. 그가 묘사하는 지저귀는 새조차 고요하다. 소세키가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할 무렵, 지병이었던 위궤양과 신경쇠약이 그를 괴롭힌다. 일본의 근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한때 만 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이었던 그의 작가 생활은 실제로 10여년 정도였다. 오십을 살지 못했다.

서두에 인용한 부분은 전업 작가의 스트레스처럼 보이지만 나는 ‘유서’라고 느꼈다. 자살과 관련한 유서가 아니라 병약한 사람이 남기는 마음의 서정, 유서(遺抒). 아프고 기력이 없다. 손목과 시력이 망가져간다. 예전처럼 일할 수 없고 인생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나는 이런 상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만 생성되는 사유가 있고 즐거움이 있다. “한가로움을 사랑한다. 자그맣게 빈둥빈둥 지내고 싶다.”(123쪽) 번잡한 생활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이 책은 사망 1년 전에 출간되었다. 소세키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유리문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유리문은 일본의 전통적인 장지문(障紙門), 즉 종이문과 달리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방문객, 나무, 바람까지. 유리문은 자신과 외부를 모두 관조할 수 있는 실재이자 상징이다. 그 외부에 죽음도 있었을 것이다.

바쁘거나 열정적인 일상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차단한다. 그러다가 하던 일에 회의가 밀려오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까운 사람이 떠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돌아가신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어도 이 동네는 그대로겠지.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삶에 몰두하고 생각을 메우는 방식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생사의 다름은 무엇일까. 소세키의 산문은 내 고민에 답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사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별것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게 끝이다. 삶도 죽음도 거창한 주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열심히 살거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남성의 관점이 있고 여성의 관점이 있듯이, 인간의 관점이 있다면 자연의 관점이 있다. 삶의 관점이 있다면 죽음의 관점이 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큰 사건이 아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짧다. 대부분은 시시하고 잘 안 써지는 글과 같다.

글의 서두에 “붓” 이야기가 나오지만 소세키는 한 번도 붓으로 원고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모두 만년필로 썼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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