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끈>, 박정헌 지음, 열림원, 2005
연초 귀농한 지인이 재배한 과일을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평소에 안 하던 일이다. “고맙다, 잘 먹겠다” 이렇게 간단히 끝날 일인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의외였다. 일단, 주소부터 알려주지 않았다. “김영란법 위반이야” 정도는 농담. “뭘 부탁하려고?”, “부담된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우리가 무슨 관계지?”…. 나는 상처받았다.
선물 사건 이후 이 책이 생각났다. 2005년 1월, 한국의 산악인 두 명이 히말라야 산맥 중 하나인 ‘촐라체’(6440m) 정상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 도중 사고를 당한다. 몸무게 78㎏의 후배 최강식이 크레바스로 추락했고, 70㎏의 선배 박정헌은 끈을 놓지 않았다. 9일 만에 생환했지만 갈비뼈는 부러지고 발목은 덜렁거리는 채였다. 두 사람 모두 손가락, 발가락을 절단했다. 더 이상 등반 전문가로서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끈>은 이 과정을 박정헌이 직접 쓴 책이다. 책 내용은 여느 산악영화보다도 ‘스펙터클’하다. 영화보다 책이 나은 경우다. 그러나 이 책을 “동지애가 부른 기적의 감동 스토리”(추천사, 광고 문안) 같은 단순한 영웅담이나 산 사나이들의 우정으로만 읽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해 5월, 책이 출간되자마자 샀다. 여러 번 읽은 책 중 하나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이고 나의 관심사가 당사자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문제라 조심스럽다.
두 사람의 상황이 극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사다. 선배가 후배를 살렸지만 먼저 산행을 제안했고, 후배는 경험하고픈 산이 많은 앞길 창창한 젊은이다. 이때, 누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 책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후배는 선배를 원망할 수도 있다. 선배는 후배에게 “많은 빚을 졌다”(222쪽)고 반복해서 말한다.(책에 후배의 관점은 등장하지 않는다.) 끈에 매달린 사람은 끈을 놓지 않은 사람에게 감사해야 마땅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둘은 서로 말이 없고 자주 만나지 않는다. 나는 목숨을 구해준 사람과 ‘빚진’ 사람의 감정, 사건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내게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감사’에 대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빚진 상태를 못 견뎌 하는 경향이 있다. 내 친구들처럼 작은 선물도 불편한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유형이다. 게다가 나는 인간관계가 많거나 넓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자존심을 “깨끗하다”고 착각하면서.
감사는 호혜적일 수 없다. 기본적으로 빚진 마음이다. 나중에 갚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부담감이다. 만일 되갚을 자원이나 의지가 없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감사를 주고받는 행위는 불편하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갈등과 분노도 잦다. ‘생명의 은인’인 경우는 갚을 길이 없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말하면 “(나는) 괜찮아요”, “당신은 (운이 좋아) 환대받았을 뿐(you’re welcome)”이라는 ‘박대’를 받는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려면 호혜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선물은 드물고 뇌물은 넘쳐난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절대로 애매하지 않다. 뇌물은 당장의 대가가 오가는 불법 구매 행위일 뿐이다. ‘불편해도’ 선물과 도움이 오가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든지 불특정 다수에게 갚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 마음의 빚으로 이루어진 연대. 채무와 채권의 관계가 유동적인 관계. 가진 것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권리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감사가 공적 영역의 의제가 될 때 돌봄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헬조선’의 대안 아닐까.
이 시대의 비극은 나의 선물 사건처럼 상호 행위인 감사는 ‘부담스럽고’, 구조적 착취는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박-최 게이트는 그 착취마저도 구조 바깥에서 일어난, 진짜 구조였으니 무슨 말을 하랴.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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