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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각하”와 “부장님”

등록 2017-02-17 21:16수정 2017-02-17 21:42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김재규 평전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문영심 지음, 시사IN북, 2013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이 3월로 미루어질지 모른다는 뉴스가 한창일 때다. 택시를 탔는데 마침 라디오에서 관련 뉴스가 나오자 기사가 짜증을 낸다. “나, 박근혜 찍은 사람이에요. 근데, 이제 끝난 거 아닙니까? 실제 무죄라고 해도 더 이상 정치 못할 텐데, 왜 저렇게 질질 끄는 거야. 빨리 꺼지지.”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한자를 숭상하는 아버지의 ‘조기 교육’ 덕분에 <소년동아> 대신 <동아일보>를 읽었다. 박정희 사망 당시, 충격이 컸는지 어린 마음에도 나는 심각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 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재판 당시 모습 외에는 알려진 사진이 없다. 그의 얼굴은 씻지 않아서인지 정신이 없어서인지 기름지고 헝클어진 긴 머리는 정말 ‘야수’ 같았다.

이후 수많은 기사, 관련서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김재규가 전두환 치하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판결이 아니고, 위인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재규의 입장에 충실한 텍스트다. 내 입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호칭이 그의 거사 이전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교도관은 사형수 김재규에게 “부장님”이라고 부른다(“부장님, 나오십시오, 이감입니다”, 350쪽).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먼저 쏜 뒤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던 대통령의 뒷머리에 총구를 대고 발사했다. 그는 거사 직후 정승화(당시 육군참모총장)를 자기 승용차에 태운다. “김 부장, 무슨 일입니까?” 정승화가 다급히 묻자 김재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리면서, “돌아가신 것이 확실합니다. 보안 유지를 해야 합니다. 적이 알면 큰일 납니다”라고 말한다(107쪽). 자기가 죽인 사람을 “각하”라고 부른다.

김재규는 일제 때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은 항복했고 그는 살아 돌아왔다. ‘적을 위한 자살’은 그의 운명이었을까. 김재규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그 자신이 유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쏘는 동시에 자신도 무너졌다.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를 멋지게 전복한 린 헌트의 역작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는 국왕 살해 후 민중(남성)의 죄의식을 다룬다. 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자매애’가 아니라 ‘형제애’였겠는가. 김재규의 죄의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국 ‘아들’의 ‘부친 살해’에 대한 죄의식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박근혜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연결되었고 그녀는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파탄과 촛불 시위 내내 김재규가 자주 생각났다. 작가는 박정희의 여자와 자식 문제, 이 두 가지가 10·26의 2차 원인이라고 본다. “최태민, 근혜 양, 지만 군”은 그때도 엄청난 골칫거리였고 김재규가 이 문제를 계속 건의했으나 묵살당했기 때문이다(273~277쪽). 나의 관심사는 부녀 대통령의 최후에 대한 비교이다. 박정희-김재규, 박근혜-최순실의 관계는 어떻게 다른가?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요지는 이것이다. 박정희의 끝은 내부 쿠데타였고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주화 역량 덕분에 아버지처럼 죽지도 않을 것이고, 다음 대통령도 전두환씨 같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에게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녀를 총구로부터 보호하고 있지만, 모든 국민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민주주의는 지난(至難)한 과정이다. 그러나 지난하다는 의미가 지겹고, 지루하고, 지친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국민이 지치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가. 택시 기사의 말처럼 국민은 분노를 넘어 “짜증”스럽다. 추운 날씨에 언제까지 천만 명이 넘는 국민이 광장에 나와서 한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가. 나는 민주주의가 인내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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