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프로작 네이션>,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김유미 옮김, 민음인, 2011
프로작(prozac)은 유명한 우울증 치료제다. 이 책이 출간된 1994년,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이 처방된 약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우울한 기분’과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구분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매우 다르다. <프로작 네이션>은 생사를 넘나드는 우울증을 겪은 저자의 통증 보고서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약물 남용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성급한’ 투약 치료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진단과 약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정신 질환’에 대한 착각과 무지의 천국이자, 전문 상담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곳은 프로이트의 ‘사상’이 대서양을 건너 ‘클리닉’으로 변신, 상담 이론과 산업이 번창한 미국이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의료 전문가들조차 약물 치료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우울증이라는 신체적 질병에 대해 아직까지도 복용 논란이 있는 것을 보면, 고정관념은 무지를 넘어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지로, 운동으로, 좋은 음식으로, 여행으로 극복하라? 삶의 의지를 관장하는 육체(뇌)가 고장 난 병인데, 어떻게 의지로 극복하란 말인가. 우울증 환자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구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 힘든 사람들이다. 통원 치료를 받는 사람은 비교적 상황이 좋은 이들이다.
저자는 하버드와 예일대학을 다녔다. <비치: 음탕한 계집>이라는 ‘제3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책의 저자이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스물여섯살에 썼다. 이쯤 되면 우울증은 실비아 플라스 같은 예술가들이 주로 걸리는 병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물론 그렇지 않다. 특히 지금 한국은 우울증이 증가하면서 전통적인 성별 구분이 없을 정도로 ‘국민병’이 되었다. 자살이 우울증으로 인한 질병사라는 개념은 언제쯤 상식이 될까.
이 책에 대한 나의 관심 주제는 자신의 고통을 기록하는 방식, 이유, 효과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고통에 대한 이해. 우울증은 증상이 곧 성격으로 오해받기 쉬운 질병이다.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있다면, 본인이 우울증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소외, 고립, 몰이해를 이해할 수 있다.
질병은 인생의 본질이지만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필, 내가 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우울증처럼 외상이 없는 질병,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질병은 흔하지만 억울함 이전에 초기 대처가 어렵다. 이미 죽었는데 계속 살고 있는 존재는 스스로도 사회적으로도 수용되기 어렵다.
24시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은 어떨까. 본인도 묘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이 작업을 성취한 드문 경우이자 많은 인류를 구원했다. 이들의 통증은 고문당하거나 사망 직전 신체가 더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살아있음에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나는 피부가 벗겨지고 가는 숨소리로 타계(他界)를 들락거리는 인큐베이터 안의 백혈병 말기 환자와 식도 마비(루게릭병)로 8개월간 굶다가 아사한 환자의 곁을 지킨 적이 있다. 위와 똑같은 상황인데, 우울증 환자는 “내 병이 보스니아, 르완다 사태보다 심각할까”(478쪽)라고 자책한다. 우울증은 그런 병이다.
<프로작 네이션> 읽기는 독자의 경험에 따라 눈물이 쏟아질 수도 망연자실할 수도 있다. 우울증 전문 의사는 우울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받기 어려운 질병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외모 묘사는 지나치게 발달했지만 고통받는 몸의 언어는 빈곤한 한국 사회. 저자는 우리를 고통의 노두(路頭)에서 심연으로 인도한다. 스스로 자맥질함으로써.
사족- 우울증은 사회성이 강한 질병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소설가 이인화씨(류철균 이화여대 교수)가 정유라씨의 대리 시험을 지시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며칠 동안 나는 아프지 않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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