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문학동네> 89호, 2016년 겨울호
성폭력 가해자는 성별 외에는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계층, 나이, 직업, 교육 정도를 불문한다. 다만 직군(職群)에 따라 작동 원리, 정당화 수법은 다르다. 주님의 은총부터 대의, 조직 보위, 로맨스, 심지어 개인의 자유까지. 종교계, 학계, 진보 진영, 예술계에 따라 그들만의 합리화 방식이 있다. 이러한 가해자 위주의 통념은 법정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공통점도 있다. 피해자를 커뮤니티에서 매장하고 진로를 막는 경우다. 가해 그룹이 문화, 지식계 종사자일 때 사회적 충격은 크다. 영화계, 미술계, 문인들의 성폭력은 최근 크게 문제화되었지만 실상은 오래된 관례였다.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는 이와 관련해 특별좌담회를 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문단 내 성폭력과 한국의 남성성’.
반가운 마음에 열심히 읽다가 의외의 구절을 발견했다. “최소한의 예술적 자율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63쪽)와 “작가와 텍스트의 분리”(67쪽) 주장이다. 자연인으로서 문인의 성폭력 범죄와 문학의 자율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는 국가보안법과 투쟁할 수는 있지만, 실정법 위에 있지 않다.
‘표현의 자유’ 논의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권력, 표현할 언어의 부재, 미디어와 권력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 자율성은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한 싸움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가부장제의 진부함을 비판하는 독창성이야말로 예술의 자율성 아닐까.
좌담회 일부 내용의 문제는 성폭력에 대해서 ‘안다’는 가정 아래,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로 고민했기 때문이다. 결국 익숙하고 자명해 보이는 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의의 시작은 진보적이지만 결론은 보수적이 되는 아이러니”(65쪽)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자율성 이슈가 초래한 필연적 난센스지 아이러니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성폭력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는가? 그런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 이슈는 쉽거나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좌담회는 문단 성폭력을 ‘해결’하는 장이 아니라 이 문제에 어떻게 새롭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계기여야 한다. 가해자의 자율성 여부를 (좌담회 제목처럼) ‘어떻게 하려는’ 논의가 될 때, 자율성이 절대 진리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다른 사유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되기 쉽다.
자율성(autonomy)은 남성성의 핵심이자, 자율적이지 못한 ‘의존적인’ 타자 혐오 논리로 비판받아온 근대적 주체 개념이다. 자율성은 ‘무엇으로부터 독립, 극복’을 전제하는데, 그것은 대개 여성성이나 관계성을 부정하는 초월에의 욕망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로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음을 증명했지만, 그 이론은 지구 밖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초현실은 없다.
“작가와 텍스트의 분리”도 당황스럽다. 이 이슈는 인간의 이성과 일관성에 대한 의문, 독자의 다양한 수용 방식에 관한 논의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는 정답이 없다. 무관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작품도 작가도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이 정도 상식을 몰랐을 리 없다. 그만큼 우리는 젠더 권력이 강력한 세계에 살고 있다. 피해자 편에 서기 어려운 이유다. 나 역시 가해자에 대한 여론 재판이나 작품의 절판에 반대한다. 그러나 “가해 작가 시집의 일시적 품절 조치”와 “저런 꼴을 보느니 문학의 꿈을 접겠다는 수많은 남녀 지망생들의 절망”을 같은 고통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계간지와 주간지의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씨네21>은 현재(12월19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영화계 성폭력 토론회를 열고 치열한 공론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어느 집단보다도 검열에 민감한 영화인들의 논의에 ‘자율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왜일까. <씨네21>은 남성 감독들의 토론도 철저히 구조적 약자의 처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모범적인 접근 방식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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