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윤동주 시집>, 윤동주 지음, 마당문고, 1986
글쓰기가 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도 아닌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칼럼이든 논문이든 다 어렵다. 생각도 힘들지만 ‘머리’ 속의 생각이 ‘손’에 이르러서는 다른 몸이 된다. 죽고 싶은 심정. 퇴고는 더 힘들다. 최대한 미리 써두는 편이다. 송고할 때 다시 쓴다. 처음 쓴 글의 망신스러움이 그때서야 보이기 때문이다.
대개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지만, 더 아찔한 절벽은 글쓰기의 두려움이다. 글쓰기는 책임과 윤리를 동반하는 두려운 일이고 두려워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어렵고 두려운 일인데, ‘빨리 쉽게’ 쓴 걸작들도 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이런 책들이 고전이 된 사례는 목록을 댈 수 없을 만큼 많다. 저자의 나이를 감안할 때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불가능한 저작이다. 자기 위치를 자각한 정치적 열정이 책이 된 것이다. 생각과 이야기가 목까지 가득 차 있을 때, 쏟아지는 일필휘지.
그러므로 글쓰기의 어려움과 ‘쉽게 쓰기’는 모순되지 않는다. 윤동주가 스물다섯에 쓴 ‘쉽게 씌어진 시’(1942년)는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108~109쪽). 내가 가진 윤동주 시집만 일곱 권이 넘으니, 시중에 유통되는 그의 시집이 얼마나 많으랴. 이 글의 출전은 1986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매 쪽마다 아르키펜코, 피카비아, 벨데 등 서양화가의 명작이 수록되어 있고, 앞표지에는 “Anthology of Youn Tong-ju”(윤동주 선집)라고 영문까지 넣었다. 백철, 손영목, 동생 윤일주 시인의 해설까지 상당한 만듦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서시’와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일 것이다. 다다미 여섯 장이면 평범한 크기다. 교토(京都)는 비가 잦고 습하다. 게다가 6월. 제국에서의 1942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작품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가는 일상. 하지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표현이 나오기까지 그의 몸은 얼마나 부대꼈을까. 고통과 고뇌, 분노와 죄의식…. 삶이 어려운 사람은 몸에서 글이 나온다. 고뇌, 생각, 언어가 서로 발효하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쉽게 씌어진 것은 ‘당연하다’. 시인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조차 부끄러워했다.
나는 이상하다. 지난 몇 주 동안 감동의 촛불 정국에서 글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나는 윤동주도 아니고 생각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므로, 글이 안 써지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유독 안 써진다. 대통령과 최씨 일가는 모든 뉴스의 블랙홀이 되었다. 그들과 정치권을 비난하면 그럭저럭 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박-최씨 일가의 악취가 워낙 기이하지만 한국인들은 정치권과 재벌, 사회 전반의 부패와 몰상식에 익숙하다는 것을. 웬만한 더러움에 징하게 강하다는 것을.
한국 사회는 박 대통령이 인간인지 비인(非人)인지를 검증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최씨 일가는 그 결과일 뿐이다. 박 대통령,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각오하고 있다. 나는 엠비(MB)가 대통령이 될 리 없다고 믿었던(웃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그가 ‘지식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촛불이 ‘국민 대 박근혜’의 전선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축제는 근본적으로 ‘우리 안의 최순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의 싸움이어야 한다. 지인들은 “더 나쁜 사람도 있지 않으냐”며 먼저 최순실, 그다음에 ‘우리 안의 최순실’과 싸우자고 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촛불은 너무 아파서 쉽게 쓰여질 만큼의 시처럼, 살갗이 벗겨지고 흰 뼈가 드러나는 수술의 아픔을 나누는 고통의 축제여야 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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