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성서>, “신약성서”, 대한성서공회, 1977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루가복음 23장 34절) 이 구절은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할 때 위로가 된다. 나는 주로 남들이 ‘사소하다’는 일에 분노하는 편이라 이 말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억울하고 분할 때 “쟤는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거야”를 중얼거리며 참았다. 대화한들, ‘가르친들’, 설득한들 알까? 소통 불가능 상황에서 최선의 지혜는 노력과 기대를 접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위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의 언행일치에 대한 찬양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이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다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마지막까지 실천했다는 것이다. 서기 30년 4월7일 금요일 오후, 예수는 예루살렘 북쪽 성벽 밖 골고다 형장의 십자가에 매달린다. 가상칠언(架上七言). 그는 임종을 맞아 십자가 위에서 일곱 가지 말을 남기는데 그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 문장의 위대함은 특정 종교를 넘어선다. 나는 이 구절이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사를 평정하는 압도적인 언어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고, 가장 추악한 모습은 자기를 모를 때 일어난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산다. 내 행동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 가해든 자폭이든 갖가지 결과, 그 여파…. 하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모든 사유는 아픔이 올 때, 피해를 당하고 적을 응시할 때 시작된다.
내가 한 행동도 누군가에게는 저런 탄식을 낳을 것이다. 내게 루가복음의 이 구절은 상처의 방패막이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는 최저선(最低線)의 정의를 일깨운다. 내 아무리 타락해도 최소한 일정 선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 내 추악함을 내가 모르는 끔찍한 상태,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내게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를 준 사람, 삶의 근거를 뽑아버린 사람, 피해자인 나를 가해자로 만든 사람, 내 자식을 죽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자기 행동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 내 경우엔 아니다.
‘죄’의 원인은 두 가지로 나뉜다. 앎과 모름. 자기 행동의 사회적 의미를 알기 때문에 저질러도 된다고 계산한 죄가 있고, 무지나 미성숙으로 짓는 죄가 있다. 그러나 앎과 모름은 절대적 기준도 없고 개인의 판단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가 협상한 결과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실정법에조차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전무죄. 권력, 힘이 법이다. 가장 대표적인, 유구한 사례가 성폭력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사회가 자기편이라는 것도 안다.
즉 ‘저들은 자기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약탈자의 깨달음 여부는 그 사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죄는 사회적 판단이지 개인의 양심, 무지 여부가 아니다. “자기가 한 일을 모르나이다?” 예수의 상황은 불리했고 그래서 용서했다. 용서는 약자의 유일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씨 일가가 살아온 방식,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고 싶을 만큼 무서운 루머, 나라를 삼킨 욕망의 규모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각자 다르다. 광장에 모인 이들의 분노처럼 이성적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내내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프랑스가 왜 그토록 잘난 척하는지 이해가 간다. 그들은 227년 전 혁명을 했고 왕의 목을 쳤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최순실급’ 연루자들은 최소한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을 안다. 아니, 몰라도 상관없다. 정의는 그들의 교정(矯正)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상화다. 인간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자신이 고통을 당할 때다. 이제 한 가지가 남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