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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등록 2016-11-18 21:18수정 2016-11-18 21:25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박근혜 지음, 남송문화사, 1993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된 책은 약 3500권종 정도로 추정된다. 박정희의 초기 자서전인 <국가와 혁명과 나>(1963), 박목월 시인이 쓴 전기 <육영수 여사>는 이제 관제(官制) 서적이 아니라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한때 자주국방 관련 글을 쓴 적이 있어서 박정희 시대의 책을 모은 적이 있다. 다시 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 단연 눈에 띈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더 놀라울까마는, 이 책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내가 가진 책은 발간 두 달 만에 6쇄(1993년 11월5일 초판 발행)를 찍은 베스트셀러였다! 당시 가격 5천원. 23년 전 출판 시장을 짐작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녀가 정치 전면에 나서기 전인데다 별 내용이 없으니 저자 자체가 상품인 셈이다. 뒤에 쓰겠지만,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 책의 시장성은 한국 사회를 배회하는 박정희 향수와 최태민 일가의 그림자가 겹친 결과다. 책을 쓴 동기는 “부모님 기념사업 중단 이후 독서와 사색, 운동으로 별다른 외부 활동 없이 조용히 지낸 탓에” 자신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서문 마지막에 “출판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주신 남송(출판사)의 자매께 감사를 드립니다”는 문구도 예사롭지 않다(그 자매는?).

책 내용은 중산층 여성의 교양이 넘치는(?) 단정한 문체에, 자기반성, 마흔 즈음에 느끼는 인생의 교훈, 마음의 평화 등으로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양과 겸양을 다짐하는 다소곳한 여인의 이미지다. 저자가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나와 만날 일이 없는 책이다. “요즘 보는 역사책이 주는 한결같은 교훈. 나라가 망하기 전에 먼저 임금의 마음이 결단난다…. 자연히 충신, 간신의 말을 구별 못한다”(92쪽) 정도가 가장 ‘과격’하다. 대부분의 내용은 “인간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이웃을 존중하고 아껴 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참되고 깊은 지혜도 올바름에서 비롯된다” 등 아름다운 말씀 일색이다. 지루하다. 문장은 쉬운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개인 박근혜’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역사적 성취’는 박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절대로 알 수 없음을 증명했다는 데에 있다. ‘글과 저자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에는 저자가 없다. 재차 말하지만, 무엇보다 읽히지가 않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은이를 알고 읽으나 모르고 읽으나 차이가 없는 글이다. 문장력 문제가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격렬하고 특이한 인생도 없을 텐데, 저자의 경험과 캐릭터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글쓴이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나오는 전형적인 글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녀에 대한 호오나 비판보다는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그녀는 독특한 인간형이다. 체현(體現)되지 않는 몸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다. 정치적 입장과 인간성의 ‘미추’를 떠나,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에게 감각을 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살아있으되 ‘선거의 여왕’으로 활약할 당시조차도 사람이 아니라 상징, 물신(物神)의 느낌이 강했다. 주로 파시스트나 나르시스트에게 발견되는 자아가 없고 타인, 이념, 물상을 뒤집어쓴 오브제(objet) 같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그나마 나는 그녀의 물신성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지금도 파악 불가능한 상태다. 오로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었고, 전 국민과 ‘국가 브랜드’는 회복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됐겠는가 아닌가’라는, 환경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지지자들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가정 아래, 그녀를 대통령이 아니라 “부모를 흉탄에 잃은 애처로운 큰딸”로 생각했다.

여기서, 역사의 반전. 그녀는 ‘근대화의 역군’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정말 ‘평범한’ 최씨네 가족이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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