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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멈춤(知止)

등록 2016-10-28 21:10수정 2016-10-28 21:1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도덕경(노자)>, 노태준 옮기고 해설(譯解), 홍신문화사, 1984

언어도단(言語道斷)은 글자 그대로 언어의 길이 끊어진 상태다. 애초 출전인 불교의 경전 영락경(瓔珞經)에서는 “너무 심오해서 말이 필요 없는 상태”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경우”에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게 “당신, 메갈이야?”라고 물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이것이 언어도단(대화중단)이다. 요즘은 “언어도단이 지속되면 참을 인(忍) 세 번 뒤에 살인이 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등장했다.

여성주의나 문화연구에서 언어도단은 피억압자의 언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남성, 서구 중심의 언설 체계에서 탈식민의 첫 단계는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이다. 길이 없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언어도단이 뚜렷하게 시각화된 장면은 발 디딜 공간이 없는 상황, 땅끝에서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미묘하고 다양한 의미가 영어로는 그저 ‘말할 수 없음(unspeakable)’이니, 여기서 또 다른 언어의 도단이 일어난다.

주지하다시피 <노자>는 잠언 같다. 비유적이고 짧다. 지은이도 명확하지 않은데다 원본도 가지각색이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주요 내용은 언어와 존재의 관계다. 서양의 언어철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말(지식)과 권력’은 인간의 근본이니 고전일 수밖에 없다.

상편 1장~37장과 하편 38장~81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장 첫 구절부터 무위(無爲)의 사상으로서 <노자>를 요약한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고, 이름이 이름 구실을 한다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언어가 존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의 한계가 아니라 조건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다른 언어로의 가능성(앎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음, 말이 안 됨, 기가 막힘, 할 말은 태산 같으나 한마디도 할 수 없음. 그래서 내 마음만 무너짐! 이 시대,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나뿐만 아니리라. 고립감과 절망을 위로받으려고 <노자>를 집었다. 희언(希言, 들어도 들리지 않는 말, 23장, 88쪽). 상도무명(常道無名, 참된 도에는 이름이 없다, 32장). 도은무명(道隱無名, 참된 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41장). 그러나 이 말씀들이 “말하지 말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좋은’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이 잘 드러나지만 나쁜 세상에서는 ‘악’을 구별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나쁜 놈들 전성시대>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익명의 악(Nameless Gangster)”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내가 만들어서 나 혼자 사용하는) ‘시대적 인격’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특정 시대에 대세인 캐릭터를 말한다. 지금 여기는 각자도생(各自圖生), 누가 더 뻔뻔한가를 경쟁하는 곳이다. 공식적, 비공식적 약탈 능력과 무지가 권력인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다. 주변이나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 이런 사람이 판치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믿어왔다. “명성과 생명 중에 어느 것이 절실할까(名與身 熟親). 욕망을 눌러 스스로 만족함을 알면(知足) 욕되지 않고, 분수를 지켜 능력의 한계에 머물 줄 알면(知止) 위태롭지 않아서 언제나 편안할 수 있다”(44장). 요즘은 그렇지 않다. 불신과 사욕을 추구하는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성과 생명 중에서 선택하지 않는다. ‘자기 명성’과 ‘남의 생명’ 중에서 선택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매일매일이 괴로운 뉴스다. 타락이 공기와 같고 언어도단의 일상이다. 욕망의 한계가 없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부럽기까지 한’ 이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가 그들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제기 하는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한다. 천지가 그런 사람이니 “너만 다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치고 공동체는 붕괴된다. 누가 멈춰야 할까.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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