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전장의 기억>, 도미야마 이치로 지음, 임성모 옮김, 이산, 2002
나는 ‘우아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편견에 시달려온 여성, 여성주의자로서 자기 검열이다. 이런 내가 절대로 입 밖에 낼 리 없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이 기사화되었다.(10월7일 <경향신문> 온라인판 ‘“민주공화국은 인간쓰레기가 없어진 사회”’) 인터뷰 당시 기억이 가물했지만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인터넷을 찾다가 “격하게 공감”한다는 여론에 당황했다.
며칠 전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관람한 젊은 여성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중인데 선생님은 이제까지 어떻게 버티셨냐”며 눈물을 쏟았다. 어제는 지방에 다녀오느라 택시를 네 번 탔는데, 세상에 대한 기사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과 짜증을 들었다. 지역에서 만난 여성들은 “지진이 난 경주와 가까워 이곳도 뒤숭숭하다, (정부가) 대책이 없다”며 성토가 이어졌다.
지금 이곳은 어디인가. 친구가 ‘최순실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내 스트레스는 거기까지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내 일상은 그보다 더한(?) 일들의 연속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드러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아주 나쁜 사람들이 대세인 사회다. 나는 그저 “살아지지 않는 인생”, “저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저 인간만 없어도”…, 이런 타령에 그치는 부류다.
언제부터인가 “인생 한순간”, “한 번에 훅 간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나의 해석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회의 도래다. 이것이 ‘헬 대한민국’의 의미다. 나의 목표는 주변에 민폐 안 끼치고 살아남는 것이다. 내가 나를 잡아두지 않으면 사고가 날지 모른다. 하긴, 사고도 생각하기 나름. 사고는 이미 여러 번 쳤고 나는 번번이 무너졌다. 이후 내 마음을 매달아 둘 주문(呪文)을 절실하게 찾아다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체 옆에 있다. 우리는 시체와 일체화될 수도, 신들린 망령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다. (…)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선 줄에 앞서간 자가 있고 다음은 내 차례다. 죽은 자의 마지막 시간, 그의 눈 망막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12~13쪽)
10년 전부터 나는 이 구절과 함께 산다. 분노가 내 몸을 패대기칠 때 ‘일’을 저지르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서 기진할 즈음 이 구절을 생각한다. 삶이란 죽은 자의 망막에 맺힌 나의 시간이다. 그래서 인생이 짧은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짧지만 최선의 저항(복수)을 모색한다. 나는 ‘총’이 없으므로 복수는 결국 맹렬하게 일상을 사는 것, 책상 앞에 앉는다. 다른 방식으로 ‘인간×레기’들을 살해하기 위해서다.
정치는 시끄럽고 일상은 편안하다는 희망을 버리면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 찾아온다. 나는 ‘인생 이모작’보다 ‘하루살이 인생’에 관심이 있다. 하루가 지옥인 이들에게, 언젠가는 끝난다(죽는다)는 사실만큼 위로는 없다. 내가 ‘자연의 법칙’을 사랑하는 이유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지만 끝에도 순간이 있으며 그 순간은 제법 길다. 끝(죽음)은 무섭거나 슬픈 일이 아니다. 분노를 간직하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악취를 껴안을 때, 더러운 인간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에 절대로 기죽지 않을 때, 나도 더럽다는 것을 인정할 때 승부를 볼 수 있다.
위 구절은 서른아홉에 암으로 사망한 일본의 소설가 다카하시 가즈미(1931~1971)와 “저항이란, 투쟁을 타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지금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1957~)의 문장을 합친 것이다.
좌절을 피할 수는 없다. 분노는 그 형태다. 삶을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사고한다면, 죽은 자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기회는 있다. 다음에 누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무지가 판치거나 전가할 희생자를 찾아나서는 사회가 바로 지옥이다. “다음은 내 차례”라는 현실을 부정할 때, 헛된 희망이 찾아오고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해자가 된다. ‘저들이’ 바라는 바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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