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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상과 나 사이

등록 2016-09-23 18:58수정 2016-09-23 20:29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세상과 나 사이-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타네하시 코츠 지음,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2016

이문열의 초기 작품이 그립지만, 쓰라린들 무엇하랴. 그는 ‘변경(變境)’한 것을. 한때 그가 말한 “시대와의 불화”(<시대와의 불화>, 1992)가 회자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두 가지 단상이 든다. ‘자기 내부의 불화겠지’, ‘시대와 나’라니. 평범하구나. 세계와 개인의 관계는 무엇일까. 가장 상투적인 발상은 세상과 나를 배타적 구도로 놓고 “세상이 마음에 안 든다, 시대가 나를 억압하고 있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등의 대칭적 사고일 것이다.

미국의 저술가 타네하시 코츠(Ta-Nehisi Coates)의 <세상과 나 사이>는 반대로 생각한다. ‘세상과 나 사이(Between the World and Me)’에는 장벽이 없다. 오히려 열려 있다. 세계는 나를 동화시키려고 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경멸하는 세상의 일부이자, 우리를 노예화하는 시스템을 동경하고 주류(백인)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이 책은 “흑인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혹독한 명상”(뉴욕 타임스), “한 흑인 남성의 삶에 담긴 위험과 소망에 대한 도발적이고 심오한 고찰”(토니 모리슨)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나는 흑인 신체 훼손의 역사, 즉 미국사로 읽었다.

예전(?)에 백인이 흑인 남성을 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익사’였다. 흑인을 드럼통에 넣고 남성의 신체에서 출혈이 많은 부위인 성기를 자르면 10분이 채 되기 전에 자기 피 속에 익사한다. 백인의 전통은 흑인 여성을 윤간한 후 몸에 상처를 낸 다음 마을의 큰 나무에 매달아놓는 것이다(영화 <미시시피 버닝>과 KKK단의 역사를 참고). 지금은 경찰 조직과 총이 대세다. 이 책의 페이지마다 총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흑인이라면, 감옥에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감옥에 가기 쉽다는 얘기가 아니라 흑인의 몸은 흑인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에겐 꿈이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로자 파크스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마틴 루서 킹이 행진할 수 있었고 오바마가 달릴 수 있었다? 저자 코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투쟁하면 얻을 수 있다고 격려하지도 않고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꿈을 좇지 말고 그저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저자가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비판한다. 흑인이 흑인의 현실을 말하는데, “지나치다”는 판단은 누가 하는가? 그는 답한다. “나는 작가다. 희망적이어야 할 책임은 전혀 없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옮긴이, 245~ 246쪽).

모든 약속은 깨지게 되어 있다. 명사보다 동사를, 상태보다 운동을, 희망보다 투쟁을.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113쪽). (여성으로서 나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란 누구인가.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어야만 사회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자신이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아래쪽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끔찍하지만, 앎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막아준다. 분노를 인정하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 투쟁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투쟁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통제 가능한 유일한 부분이다. 미국의 흑인은 항상 맞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바로 뒤에서 사냥개가 쫓아오는 레이스에 던져졌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갈 특권이 없다”(166쪽).

‘흑인’인데 ‘백인’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독자라면, ‘세상과 나 사이’에 불화나 부적응 따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다면 읽기를 권한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문체, 피식민자가 자기 서사를 다루는 방식의 모범이 되는 글쓰기다.

한국의 (남성)독자를 위해 사족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사용하는 ‘투쟁’과 저자의 ‘투쟁’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종종 자신을 잊기 위해, 미화하기 위해 심지어 남을 억압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본다. 투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알기 위한 투쟁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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