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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멸의 공포 안겨준 ‘야만의 근원’ 묻다

등록 2014-05-14 16:31수정 2014-05-15 10:42

[한겨레 창간 26년 특집, 새 고전 26선]
인간은 원자를 쪼갤 권리가 있는가
체르노빌의 목소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새잎(2011)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는 나라가 망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참담함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를 두고 내리는 객관적 판단이다. 나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절멸의 공포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망해버린 나라에 멈춰 서 있는 우리에게는 인생의 의미를 떠올리고, 이 세계를 조각조각 해부하는 과업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수장된 세월호 선실에서 끝없이 타전되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알아듣고 기적처럼 깨닫는 일이다.

나는 세월호 사태에서 체르노빌을 떠올렸다. 체르노빌을 겪은 인민들은 시인이 되었고, 철학자가 되었다.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받아 적은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가 가능한가’라고 물었던 아도르노의 질문을 뒤집는 기나긴 한편의 시이자, 국가와 인민의 삶에 연루되는 야만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철학서다. 그것은 “100년 후면 인간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믿음 같은, 그런 기대가 지금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날카롭게 묘파하는 역사서이기도하다.

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인간은 원자를 쪼갤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환원시켜보았다. 자연 세계는 원자의 안정성에 절대적으로 기대어왔다. 쪼갤 수 없었으므로 물질의 기본단위로 규정되었던 원자핵을 억지로 쪼개고 거기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불러냄으로써 저들은 절멸의 기초를 닦았다. 저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버렸다. 우리는 세월호가 그러하듯, 최소한의 상식과 윤리 감각을 갖춘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어떤 일들을 끝내 감행하고 그 이익을 독점적으로 향유하고는, 발생한 불상사의 모든 책임을 인민에게 뒤집어씌우는 자들의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우리가 알아들었더라면 후쿠시마는 없었다. 고리 지역의 노후 원전 4기를 연장 가동하려는 저들의 야심에서 비롯된 밀양 송전탑도 없었다.

이미 망해버린 나라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될 일을 끝내 저질러버린 저들을 끌어내리는 과업보다 긴요한 것은 없다. 세월호 이후에도 이 나라는 체르노빌을 향해 진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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