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티아 센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하고 종교나 인종, 민족 등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축소할 때 폭력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가족 가운데 남성 3명이 검문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라크 바그다드의 한 가족이 통곡하고 있다. 바그다드/AP 연합뉴스
[한겨레 창간 26년 특집, 새 고전 26선]
협력보다 경쟁, 포용보다 배제 부추겨
단일정체성으로 인간 축소 폭력 낳아 센이 인간의 정체성과 폭력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끔찍한 폭력 때문이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끝나갈 무렵 어린 센은 카데르 미아라는 가난한 무슬림 날품팔이가 이웃인 힌두교도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불과 어제까지 서로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슬람교와 힌두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이유를 열한 살 나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슬람교와 힌두교라는 차이 때문에 폭력에 휘말린 이웃들이 계급적으로는 서로 동일한 가난한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센은 어느 사회건 가장 약자들이 이런 획일화된 정체성으로 인한 폭력 앞에 제일 먼저 희생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한 가지 정체성으로 인간을 축소시킬 수 있다는 ‘환영’은 결국 대립을 조장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강자들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며, 폭력이란 이런 학살의 명령자들에 의해 선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어린 학생도 바보처럼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증오는, 여보게, 예술일세”라는 시가 암시하듯이 어린 센은 증오를 배우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무릎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카데르 미아를 위하여,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유를 사랑하는 다른 세상을 상상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센은 빈곤과 공정성을 논하며 현대경제학이 만든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단일한 정체성도 환영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많은 동기와 욕구 중에 오직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심을 마치 인간의 전부인 양 왜곡함으로써 오늘날 협력보다는 경쟁에, 포용보다는 배제에 입각한 매우 폭력적인 경제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을 이렇게 축소함으로써 폭력으로서의 빈곤은 더 깊어지고 강자들은 더욱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옹호자였던 미국 시인 휘트먼은 이렇게 물었다. “동지여, 내 그대에게 돈이나 법률에 앞서 소중한 내 손을 내미나니, 그대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서로가 손을 내밀어 서로를 구해주는 것이 바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박혜영 인하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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