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니>는 전쟁의 암운이 짙게 깔린 1938년 영국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쓴 문명비평서다. 250쪽 안팎의 이 작은 책자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주는 것은 전쟁 방지와 평화 증진을 위한 인류 보편의 과제가 어떻게 여성의 교육 및 경제적 자립과 연관되는지, 그리고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이 과제의 수행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깊은 생각이 전개된 데 있다.
<3기니>는 한 여성이 전쟁 방지를 위한 활동에 기부금을 내 달라는 어느 신사의 편지를 받고 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한통이다. 스스로를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라 지칭하는 ‘나’는 신사의 대의에 공감하며 1기니를 조건 없는 선물로 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여자대학의 증축과 여성의 직업 마련에 각각 1기니를 기부하는 것이 전쟁 방지책임을 밝힌다. 남성들이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는 시대에 여성들이 이 파괴적 참상을 막으려면,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여자대학의 증축은 남성의 전쟁충동을 거부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기르기 위해, 여성의 구직은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하다. 이것이 수많은 영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남성 독재자를 막는 길이다.
작중 화자가 1기니를 전쟁 방지 활동에 기부하기로 한 것은 여성도 남성과 함께 인류 보편의 과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돈은 기부하지만 남성이 만든 협회에 가입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목적에는 동의하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여성과 남성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이유다. 울프는 정신의 ‘자존’을 지키며, 특권을 가지려는 자를 ‘비웃’고, ‘거짓 충성심을 배제’하며, ‘청빈한 삶’을 사는 것이 여성들이 따라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거짓 충성심의 배제와 청빈한 삶은 울프가 특히 강조하는 덕목이다.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탐욕의 추구는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거짓 충성심의 배제가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는 급진적 문제의식과 접속하도록 만든다면, 탐욕의 거부는 무분별한 이윤추구에 지배되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로부터 단절하는 윤리적 선택을 촉구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규정력이 점점 커져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간극이 극도로 넓어지는 오늘날, 여성들이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은 이 질서로부터 자신을 빼내 배제된 자들의 보편적 해방을 위해 싸우는 일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이 <3기니>를 다시 읽어야 하는 절절한 이유다.
이명호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