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드레퓌스>, 니콜라스 할라즈 지음
황의방 옮김, 한길사, 1978
<드레퓌스>, 니콜라스 할라즈 지음
황의방 옮김, 한길사, 1978
출판사(史)에 무지한 탓이겠지만 이런 책이 ‘1978년 남한사회’에서 나왔다니 그 시절이 ‘중세’만은 아니었나 보다. 어릴 적부터 집에 굴러다니던 책인데 이렇게 의미 있는 책인지 몰랐다. 책날개에는 송건호와 김동길의 추천사가 있다. ‘비교’ 가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김동길의 글이 조금 더 울림이 있다. “진실만이 역사를 창조·발전시킨다”(송건호), “졸라 같은 양심적인 역할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절박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김동길). 이 의견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인식일 것이다.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라는 한국어 부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저자 니콜라스 할라즈는 1895년 헝가리 태생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언론인이다. 1957년에 출간된 이 책은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과 그의 생애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원제(Captain Dreyfus The Story of a Mass Hysteria)는 집단 히스테리라고 분석한다.
드레퓌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작 간첩 사건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것은 이 사건의 승리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정의, 진실, 인권 존중이라는 근대 계몽주의의 미덕을 증명하였고, 인류는 여전히 이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는 간첩과 조작의 모든 요소가 등장한다. 자국이 파견한 간첩을 의심하는 국가, 범인이 유태인이어서가 아니라 유태인이어서 범인이 되는 현실, 그를 반역자로 몰기 위한 대화에서 “120㎜ 포의 수압식 제동기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드레퓌스가 갑자기 손을 멈춘 것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식의 유죄 추정,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 에밀 졸라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사명(그가 쓴 “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신문은 하루에 30만부가 팔렸다), 드레퓌스의 억울함에 재심을 요구하는 세력과 재심반대파의 10년에 걸친 갈등과 투쟁….
한편 나는 이 사건이 역사의 모범으로서 지나치게 상기되는 것이 다소 불편하다. 드레퓌스의 12년, 아니 평생에 걸친 고통과 양심세력의 투쟁 덕분에 ‘공화국 프랑스’는 한국 같은 ‘제3세계’가 본받아야 할 민주주의의 모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이 대외정책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알제리를 보라. 그들의 정의는 국내용이지 다른 인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읽은 <드레퓌스>의 교훈은 진실의 승리라기보다는, 간첩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간첩은 국가 단위의 적을 전제한다. 당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독일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긴 직후였다. 복수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한 시기에 간첩 만들기는 너무 쉽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다.”(148쪽) 이 문구는 “프랑스가 이 나라 자체의 원칙(인권)에 의해 붕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사회주의자들과 르낭 같은 유명 사상가를 포함한 은폐 세력에 맞서, 재심요구파의 선두에 섰던 조르주 클레망소가 쓴 감동적인 글의 일부다.
국가는 영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정신으로도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클레망소는 후자의 문제, 즉 어떤 가치를 가진 프랑스가 진정한 프랑스냐고 호소했다.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국가는 실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이념들이 경합하는 제도다. 국론통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페어플레이는 중요하다.
간첩은 고도로 훈련된 ‘비공식 외교관’으로 국경과 국가가 실재한다는 관념을 현실화하는 존재지만 국가간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적’과의 관계가 아니라 국내 정치에 따라 영웅 혹은 배신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조작 간첩으로 몰린 피해 당사자의 고통을 차치하고 말한다면, 진짜 간첩과 조작 간첩의 차이는 ‘크지 않다’. 오히려 조작이다 아니다가 주된 논쟁이 되면, 조작은 더 쉬워진다. “간첩은 있다”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간첩은 국내 정치의 필요이자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간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간첩의 정치적 효과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관련영상] [#9.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여간첩 원정화 사건, 공소장이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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