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손 무덤’, <머리띠를 묶으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박노해 지음, 미래사, 1991
‘손 무덤’, <머리띠를 묶으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박노해 지음, 미래사, 1991
턱뼈 탑. 글자 그대로 잘라낸 사람 턱뼈를 쌓은 탑(a tower of shaved chin bones)이다. 최근 서울 강남구 소재 한 성형외과는 안면 윤곽이나 사각턱 수술에서 절개한 환자의 뼈를 투명 유리기둥에 넣어 병원 로비에 전시했다. 이 소식은 사진과 함께 <주간경향>과 미국 <타임>지 온라인판에 상세히 실렸다. 강남구청은 의료폐기물 처리기준 위반으로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할 예정이라고 한다.
처음 사진만 본 사람들은 구청 관계자의 표현대로 “단순조형물”인 줄 알았다가 인체 적출물인 줄 알고 기겁했다. 인간은 몸 안팎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안은 절대적으로 깨끗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피부라는 형태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플라톤 시대부터 눈물, 침, 월경혈, 콧물, 대소변 같은 체액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왔다.
가장 일상적인 사례는 장애일 것이다. 훼손, 돌출, 함몰, 나약함 등 ‘매끄럽지 못한 몸’은 무질서와 비정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물론 정상적인, 더구나 아름답다고 정해진 몸의 형태는 당연히 없다. 시대와 사회마다 사람들이 만들어온 주관적인 기준이 있을 뿐이다.
턱뼈 전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이 정도로 많이 깎아낸 전문 병원이다? 성형 왕국의 국제적 망신? 징그럽다? 나는 성형수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턱뼈 무덤’을 보고 박노해의 시 ‘손 무덤’이 생각났다. 여기서 예술다움이 무엇인가를 가장 창조적인 방식으로 질문한 그의 시를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여년 전 최소한 내 주변에서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외우고 노래했다.
손 무덤은 “프레스로 싹둑싹둑”, 손목이 날아간 손들의 원한이 쌓인 무덤이다. 시는 3면에 걸친 진실이다.(35~37쪽)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기계 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시를 읽는 이들도 할 말을 잊는다.
몸의 변형에는 외부의 요인과 사람 자체의 변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턱뼈 탑과 손 무덤이 몸 밖의 원인이라면, 개인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체현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나 변태(變態) 같은 성장으로서 변형이 있다.
몸에서 분리된 인체. 턱뼈는 ‘돈을 주고’ 잘라낸 것이고 손 무덤은 ‘돈 벌려다’ 잘려나갔다. 턱뼈는 자해(?), 손 무덤은 피해다. 성형과 산업재해는 상반되는 현상처럼 보이지만, 둘 다 먹고살려다 벌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몸들이다. 생존의 비참은 다양하다.
두 가지 현실은 인식론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생각대로의 삶과 몸에 근거한 삶이 그것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 내가 몹시 경계하는 말이다. 턱뼈 탑은 한국 사회에서 생각한 대로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종착이고, ‘손 무덤’은 사는 대로 생각한 예술이다.
‘불필요한’ 성형시술은 사회적 요구를 몸에 실현하여 체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은 ‘지금 자기’를 부정하고 욕망에 따른 가치 지향적 삶이다. 그 가치가 바람직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 말은 경쟁사회의 자기 다짐, 다이어리 첫 장의 문구다. 경제적 성취든 인격과 실력 배양이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은 사회적 위치성과 당파성의 행위자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 당한 몸’, ‘노동하는 몸’, ‘성폭력 겪은 몸’에서 시작하는 삶. 이것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은 모두 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空’想)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는 몸이 아닌가? 의식은 몸의 어느 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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