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지음
이문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4
<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지음
이문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4
며칠 전 헌책방에서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을 횡재했다. 책을 든 채 자주 가는 빵집에 들렀다. 주인이 나를 보자마자 놀란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어째….” 자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들고 있을 뿐인데, 나는 불길한 부적이 되었다.
‘자살의 이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사 그 무엇이든 이해하기 쉬운 일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서로 이해해달라고 싸운다. 사람마다 각자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가 있다. 이해는 공부, 습득, 인지와 혼재되어 있다. “제발 나를 이해해달라”, “이 문장을 이해하겠니?” 전자는 수용에 가깝고, 후자는 학습에 가깝다.
이 나라는 앎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다(국가보안법), 사회는 자체 검열을 초과 달성하여 스스로 무지를 추구하는 분야가 많다. 가족 제도와 자살이 대표적이다. 자살이나 정신질환 관련서는 제목에 편견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책의 사명을 망각한 처사다. 건강 약자로서 분노한다. 번역서 제목을 정할 때 시장성이나 한국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원서 내용과 정반대거나 판관을 자처하는 제목은 폭력이다. ‘빵집의 그 책’도 원제는 단순한 <자살>(suicides)인데 비난과 개탄의 어조, <도대체 왜들 죽는가>로도 번역되어 있다.
<자살의 이해>도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최근 책을 교재로 삼지 않은 이유는 그 옮긴이가 같은 저자의 조울증을 다룬, ‘불안한/소용돌이치는/고요하지 않은 마음’(Unquiet Mind)이라는 멋진 원제를 <조울증,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로 번역했기 때문이다.(이 지면에 쓴 책이다) 옮긴이만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지 여건이 작용했겠지만 책 내용과 무관한 어이없는 제목이다.
<자살의 이해>는 제목 그대로, 자살의 이해를 돕는 책이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약간의 각오가 필요할지 모른다. 심리적 부검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직까지 자살은 편견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인간 행동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저술의 모범이다. 사회적 필요, 다학제 관점, 정치적 열정, 전문 지식, 고통에 대한 공감. 생명체인 인간과 사회적 인간, 개인과 구조. 이 쟁점을 상호 융합적으로 다룬다. 자살은 복잡한 현상이지만 금기가 무지를 부채질했을 뿐 우리는 자살을 이해할 수 있다. 자살에 대한 반응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척도다.
책 제목에는 ‘~ 이해’가 많다. 이해(理解)는 이해(利害)와 거의 같은 말이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영어 표현이 좋다.(under/standing)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127시간>은 상영 시간 내내, 사막 한가운데 바위 사이로 떨어진 주인공 제임스 프랭코만 나오지만 충분히 흥분되는 텍스트다. 이 영화에는 삶의 전(全) 시간이 나온다. 유능한 등반가가 추락 사고로 돌에 팔이 끼어 127시간을 버티다가 결국 스스로 산악용 칼로 팔을 자르고 탈출한다. 절단까지의 망설임, 외로움, 고통. 이것이 이해의 과정이다.
이 영화는 실화지만 동시에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팔을 잘라내지 않으면 죽음이 진행된다. 물은 떨어져가고 통증은 격화되며 강렬한 태양 아래 몸은 썩어 간다. 살기 위해서는 몸의 일부를 버려야 한다.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保守)하지 않는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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