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등록 2012-06-01 19:59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언니의 폐경>, 김훈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2005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지미 호파는 마피아 보스 알카포네를 만난 뒤 부러운 듯 말했다. “그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이 말은 내가 반복해서 생각에 담그는 글귀 중 하나다. 몸, 특히 손은 일상의 노동과 계급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여성’은 남녀 모두에게 성별화된 계급적 욕망이다. 나이듦과 외모의 의미는 성에 따라 다르다. 남성의 나이듦은 돈이나 지식 같은 자원으로 ‘커버’ 가능한 측면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나는 최근 몇 년 사이 3번 삭발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였다. 주변의 반응은 머리 감기보다 더 번잡스러웠다. “암이니?” “(머리가) 아프니?” “논문 스트레스?”…. 내 진심(게으름)을 몰라주고 사람들이 너무 걱정해서 잠시 나의 사회성을 의심했지만, 실상 나는 매우 사회적인 인간이었다. 30대 중반 이후 그리고 글쓰기 노동을 하면 할수록 급속도로 희고 가늘어지는 머리카락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 이런 나의 무의식이 삭발의 진짜 이유였다. <언니의 폐경>. 예전에 스쳐 지나갔던 지혜로운 이를 찾아갔다.

작가 김훈의 팬덤은 상당하다. 그는 매력적인 영주다. 나는 아직 그의 국민은 아니고 성 밖에서 서성인다. 무슨 콤플렉스인지 모르겠지만 김훈의 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지인에게 말하는 것이 자유롭지가 않다. <칼의 노래> 같은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다음 세가지-이미 ‘합의된 사실’이겠지만-를 주장한다. 그는 소설, 논픽션, 기사, 수필을 불문하고 모든 글을 잘 쓰는 예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장르의 구별을 의문한다. 신문 기사 “라파엘의 집”은 수필인가, 시인가, 슬픈 일기인가. 그는 수상 소감도 잘 쓴다.(<언니의 폐경>은 황순원 문학상 제5회 수상작) 그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물상이든 묘사 대상에 대한 대상화를 최소화하는 윤리적인 작가다. 그의 글이 <풍경과 상처>가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나의 과독(寡讀)을 감안하고 말한다면, 박완서가 일상에 관한 뛰어난 서술가였다면, 육체에 해당하는 작가는 김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장>(化粧/火葬)을 읽은 독자는 더욱 동의하리라. 몸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몸은 교환, 사용, 묘사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사고와 생활을 체현하는 사람 자체다. 몸은 사회이며 정신(mindful body)이다. 몸에 대해 쓰는 것은 인물을 쓰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 쓰는 것이다. 몸에 주제가 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었다 …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32쪽) 겨울 방바닥의 정전기와 긴 머리카락의 탄성. 젊은 여성의 육체, 중년의 부부 관계, 남편의 정사를 알게 된 아내. 이 상황이 머리카락에 다 있다.

소설의 화자인 50대 여성은 출세한 남편이 이혼을 원하자 “왜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왜 헤어져야 하는지를 물을 수가 없어” “…날이 흐려서 비가 오고 비 오는 날이 저물어서 밤비가 내리는 것처럼 느껴져…” 남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한다. 매달리고 상대 여자를 찾아가 머리끄덩이를 잡는 ‘사모님’은 없다. 그녀는 “대표이사 부인”을 유지하려는 계급투쟁 대신 다른 사랑을, 시간의 풍랑을, 오늘 이 시간을 산다.

삶에 대적하는 그녀의 태도. “남편의 속옷에 붙어 있던,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관하여 나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데, 마지막 예절과 헤어짐의 모양새로서 잘한 일이지 싶다.”(36~37쪽) 나는 이 문장을 넘기지 못하고 몹시 몸부림치고 몹시 몸서리쳤다. 나이 들어 영원히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들과 세월로 인해 잃고 얻을 모든 것들과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여성학 강사

<한겨레 인기기사>

간호사들 고백 “환자 입원 2주 넘어가면 병원서 ‘작업’”
결별 '장윤정' 깜짝 놀랄 노홍철의 '대반전'
김성주, 파업 대체인력 ‘MBC’ 복귀…“빈집털이범” 비난 빗발
애플 경영자 팀쿡 “삼성전자 미친 짓” 맹비난 왜
[화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오징어 게임2’ 배우 이주실 별세…위암 투병 석달 만에 1.

‘오징어 게임2’ 배우 이주실 별세…위암 투병 석달 만에

제30회 ‘한겨레문학상’ 공모 2.

제30회 ‘한겨레문학상’ 공모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3.

‘믿음’이 당신을 구원, 아니 파멸케 하리라 [.txt]

로제 ‘아파트’ 발매 105일 만에 유튜브 10억뷰 돌파… K팝 신기록 4.

로제 ‘아파트’ 발매 105일 만에 유튜브 10억뷰 돌파… K팝 신기록

번잡한 일상 내려놓은 대도시의 매력 찾아…하루짜리 서울 여행 5.

번잡한 일상 내려놓은 대도시의 매력 찾아…하루짜리 서울 여행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