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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리스어랑 씨름하는 ‘노전사’의 오디세이아

등록 2007-02-01 21:07수정 2007-02-02 17:37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1970년대 초반 이래 40년 가까이 그리스·라틴어 원전 번역에 몰두해왔다. 그가 번역한 책은 지금까지 40여종에 이르며, 대분분이 국내 최초의 원전 번역이다. 70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원전 번역의 노전사라 할 만한다. 사진 숲 출판사 제공.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1970년대 초반 이래 40년 가까이 그리스·라틴어 원전 번역에 몰두해왔다. 그가 번역한 책은 지금까지 40여종에 이르며, 대분분이 국내 최초의 원전 번역이다. 70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원전 번역의 노전사라 할 만한다. 사진 숲 출판사 제공.
속속 번역되는 원전들 표지마다 ‘옮긴이 천병희’
스무살 열정 품은 ‘60대 청년’은 매일 6~7시간씩 사투하며 3년새 10권을 냈다
“왜 매달리냐면 봐도 봐도 재미있거든”

커버스토리 /

서양 문화의 원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전 그리스어·라틴어 원전 번역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서양 고대철학사를 오래 연구한 원로 학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어권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연구자들도 번역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서양을 앎으로써 서양을 넘어서는 학문 전략의 하나가 원전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분야에서 평생에 걸쳐 사투해온 학자가 천병희(68) 단국대 명예교수다.

천 교수의 번역 작업의 결과는 2004년 이래 매년 두세 권씩 숲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있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작해 최근에 출간된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까지 10권이 나왔다. 이 가운데 대다수가 국내 최초의 원전 번역본이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는 헬레니즘 시대 아테네 출신 문법학자 아폴로도로스가 수집·정리한 것을 초역한 것이며, 로마 건국 신화를 다룬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그리스·로마 신화의 집대성이라 할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첫 원전 번역본이다.

대부분 국내 첫 원전 번역

<그리스를 만든 영웅들> <로마가 만든 영웅들>은 비록 완역판은 아니지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주요 인물들을 그리스어 원본에서 뽑아 옮긴 것이다. 천 교수는 로마 시대의 위대한 산문들의 원전 번역본도 펴냈는데, 세네카의 글을 묶은 <인생이 왜 짧은가>, 키케로의 원숙한 사유가 내장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리스어로 쓴 <명상록>이 그것들이다. 이 세 번역 작품도 모두 원전을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는 국내 최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는 천 교수가 과거에 이미 번역한 것을 다시 전면적으로 손질해 펴낸 것이지만,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 작품이다. 이밖에 천 교수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의 번역본을 2002년에 한길사에서 펴내기도 했다. 학자로서는 황혼이라고 해야 할 60대에 어떤 젊은 학자도 따라오기 힘든 투지로 고전 문헌을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꼼꼼하게, 정확하게’를 표어로 내걸고 하루 6~7시간씩 책상에 붙어앉아 문헌과 씨름해온 그는 말하자면, 원전 번역의 노전사다.

이 노전사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어·라틴어 고전 번역에 관한한 젊은 시절부터 맹렬한 전사였다. 30대 혈기 넘치는 시절이던 1970년대 초반 고대철학자 박종현 교수와 플라톤의 대저 <국가>를 함께 번역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의 고전 사랑은 대학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서울대 독문과에 입학한 그는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그리스어 문법을 배운 뒤 서양의 아득한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고향에도 내려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읽기 시작했다. 첫날에는 온종일 50행 정도 읽었다. 그때만 해도 편리한 호메로스 사전이 있는 줄 몰라 옥스퍼드 희영사전(그리스어-영어 사전)을 뒤져 동사나 명사의 원형을 찾아 노트에 옮기는 고된 작업을 했는데 이미 플라톤을 읽으며 고대 그리스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심취해 있던 터라 내가 호메로스를 읽는 것을 아무도, 아니 나 자신도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호메로스뿐이었다. 호메로스 읽기는 방학 때문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강의시간과 시험 때를 빼고는 계속되었다. 3학년 겨울방학 때 <일리아스>를 끝내고 <오뒷세이아>를 읽기 시작했다.”(위즈덤 하우스 펴냄 <공부의 즐거움> 중 ‘플라톤이 열어준 지식의 향연’에서)


한번 불붙은 열정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61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부모님과 4년만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젊은 문학도는 정작 해야 할 독문학은 제쳐둔 채 그리스어 공부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리스어를 제대로 하려면 이웃 언어인 라틴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먼 이국 땅에서 라틴어 학습을 시작했다. 몇 년 공부 끝에 그곳 주 정부가 시행하는 그리스어검정시험과 라틴어검정시험에 합격했다. 고전 연구자로서 자격을 획득한 셈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약속했던 4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1966년 귀국한 그는 서울대 사범대 독어교육과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공부는 고전 문학을 했는데, 가르치는 것은 독일문학이었다.

대학서 그리스 문법 배우다 끌려

그러다가 사건이 터졌다. 1967년 온 나라를 뒤흔든 ‘동백림사건’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거주하던 예술가·연구자들이 대거 ‘간첩’ 혐의로 잡혀들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천 교수는 독어과 임용 석 달 만에 교수에서 죄수로 떨어지고 말았다.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고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10년 자격 정지라는 사슬에 묶여 그 뒤로도 10여년을 강단에 설 수 없었다. 70년대 초반 감옥에서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번역밖에 없었다. 옥중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생활고가 그 열정에 풀무질을 했음은 물론이다. 사악한 권력이 한 젊은 학자를 강단에서 나꿔챈 것은 그 개인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불행이었겠지만, 고전 작품 번역이라는 인문학의 중대 사업에는 오히려 행운이 되었다. “만약 그때 대학에서 독문학을 계속 가르쳤다면 고전 번역에 뛰어들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동백림 사건’ 뒤 강단 10년 못서

81년에야 단국대 강단에 다시 서 교수의 직위를 되찾은 그는 한동안은 독문학 연구와 강의에 힘을 쏟았다. 대학 입학 후 30년 만인 86년에야 18세기 말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94년 천 교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고전 번역 생각은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정년 이후의 일로 미뤄 두었는데,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새로이 결심을 하고 원전을 붙들었다.” 50대 후반이었다. 20대에 그 세계에 눈떴고 30대에 첫발을 내디뎠던 고전 번역은 이제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스 3대비극 시인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을 잇따라 번역한 것이 노년의 그가 얻은 첫 결실이었다.

무엇이 그를 옛 시대의 문헌으로 파고들어가게 했을까. “우선은 재미가 있었다. 옛날의 지혜는 여전히 오늘에도 통용된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보자. 이 작품은 현대에도 수많은 드라마로 계속 각색되고 변주되는데, 국법이 우선이냐, 인륜이 우선이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고 있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감동을 준다. 게다가 고전어 세계는 서양 문화의 원류다. 서양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필수다. 서양의 역사와 정신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학자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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