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9월 제1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받을 당시의 김석범 작가. 서울 은평구 제공
제주4·3이 대변하는 뒤틀린 현대사를 일본 사회에 알리고 친일의 책임을 또한 물은 <화산도>에 이어 그 완결편인 <바다 밑에서>(2020년)의 한국어판(
관련기사)을 최근 국내 소개한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 내년 백수(99)를 맞는 그의 필체엔 여전히 힘이 건재했다. ‘분노’만큼의 적확하고 낡지 않은 단어로, 그의 분노는 퇴색될 수 없어 보였다. 그에게 일본어 대하소설을 20년에 걸쳐 완성(7권, 1997년 완간)하고도 <바다 밑에서>가 필요한 까닭을 지난달 29일 전자우편으로 물었다. 그는 400자 원고지에 한글 자필로 쓴 답변 8장을 보내왔다.
―7권의 <화산도>을 완성하고도, 나이 아흔이 넘어, 추가로 완결편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진정한 8·15 해방공간은 남북의 평화적 통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한마디로 반통일 분단 역사의 형성기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의 제노사이드인 제주4·3 대학살은 8·15 해방공간 시대에 일어났다. 역사적 과오를 범한 8·15 해방공간 형성을 시정하기 위한 역사적 재심, 진정한 제2해방공간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화산도>에서 움직이는 여러 군상은 대체로 해방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가 자의적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작품 자체의 요구, 작품에 담은 시대의 요구, 작품 안 인물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2000년 <바다 밑에서, 땅 밑에서>, 2006년 <땅속의 태양>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 의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권력에 의해 말살당한 기억이 부활하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 죽음의 섬, 침묵의 섬 제주도.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얼어붙은 기억이 한시에 한꺼번에 햇볕 아래 지상으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하늘 아래로 솟아나는 것이다.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기억의 부활이다. 땅밑에 바다밑에 파묻힌 기억이 되살아나는 행로, 죽은 자는 산자 속에 산다. 기억의 전승이다.”
―올해가 4·3 항쟁 75주년입니다. 한국인들이 왜 아직도 4.3을 주목해야 할까요.
“4·3은 제주도의 지역적 문제가 아니다. 4·3의 해방은 8.15 해방공간의 재심과 진정한 해방공간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8·15 해방공간의 재형성-이승만 정부 해방공간의 재심사. 동시에 4·3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정명(正名)이 필요하다. 4·3을 주목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8·15 해방공간을 국민의 힘으로 재심사하라는 것이다.”
―주인공 이방근은 자주 “돼지가 되어서라도 살아남아라”라고 했습니다. <바다 밑에서>는 그 유지의 전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개죽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학살터에서 살아남아야 언젠가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돼지가 되어서라도 목숨을 지탱해 적과의 싸움터에 나서야 한다.”
김석범 작가는 400자 원고 8장에 한글 자필로 답변을 보내왔다.
―4·3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과거 여건을 두고 “기억의 자살과 타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이 거꾸로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처럼도 보입니다. 최근 한일 양국의 만남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한국 대통령은 한일 간에 과거 역사 청산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몇번이나 사과했다면서 솔선 방일(한 것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원조 가운데 ‘3억달러 무상자금’을 ‘독립축하금’으로 간주한 사실부터 “치욕적”이라 말했다.
김석범 작가는 “답변에 궁리를 많이 하게 된다”며 회신을 늦췄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에 이어 공교롭게 독도 소유 주장을 심화하고 강제징용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히는 일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검정 소식이 전해지던 때다.
김 작가는 연애(에로)소설을 쓰고 싶단 말을 종종 해왔다. 그는 말했다.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가공의 사회를 설정하여 남녀군상의 생활상을 그리고 싶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풍기는 에로티시즘을 찾아보고 싶었지요. 여성의 사랑과 복수. (이제) 헛된 말이 되어서 미안합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어느새 나이도 먹고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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