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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묘한 색 옷 지어 세계를 입히겠어

등록 2006-02-23 17:28수정 2006-02-24 19:02

그니는 늘 유쾌하다. 설혹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고민하는 틈틈이 터뜨리는 웃음이 지금의 그니를 있게 했을 것이다.
그니는 늘 유쾌하다. 설혹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고민하는 틈틈이 터뜨리는 웃음이 지금의 그니를 있게 했을 것이다.
10년 전 생활한복으로 대성공
명품 각축장 강남서 참패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 채비
해답 찾을 때까지
부디 책상머리 떠나지 말길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우리 옷 ‘이새’ 만드는 정경아씨

주말의 인사동을 거닐어 본 지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곳은 갈 곳 몰라 방황하던 내 청춘시절의 영혼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건만 낯설기만 했다. 넘쳐날 듯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나마 익숙한 골목길을 발견하고는 그 언저리에 서서 두리번거려 봤지만 모든 것이 눈에 설기만 했다. 아니 눈길을 빼앗는 곳은 많았지만 머물 곳이 없었다는 것이 옳겠다. 되짚어보면 거리는 변화하는 현실사회와 타협하며 제 나름의 치장을 한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아예 그곳을 떠나거나 떠들썩하게 반대를 했지만 첨예한 자본주의적 논리를 앞세운 사람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거리는 제 갈 길을 걸어 지금 이 지경의 모습으로 나와 맞닥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 돌실나이 이름 어때”

잰 걸음으로 인사동을 지나 여전히 낡아만 가는 낙원상가 근처로 만나러 간 사람은 정경아(37)씨다. 그니는 꾀죄죄하고 후미진 건물의 3층에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에 서먹하기만 했던 인사동에서의 심사를 풀며 다다른 사무실, 제품 개발실과 맞붙어 있는 그니의 사무실은 온통 옷으로 둘러싸여 마치 창고와도 같다. 그나마 지난해 겨울에 보던 것과는 달리 사뭇 깔끔해져 잠시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말았다. 짐작했을 테지만 그니는 옷을 만든다. 그것도 조물조물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사동에 ‘이새’라는 브랜드의 매장을 두엇이나 두고 지방에도 대리점격인 매장들이 있으며 삼십 명 가량의 직원들이 서로 힘을 합하는 기업의 대표다.

그러나 내가 그니를 처음 만났던 1994년에는 옷을 만들지 않았다. 다만 옷을 만들고 싶어하는 의상디자인학과 출신의 앳된 사회초년병이었다. 당시 그니는 답사를 좋아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누리앎’이라는 문화유산 답사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들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던 답사나, 여행사가 중심이 되어 주도하는 관광지 중심의 나들이와는 다른 여행 방식을 대중화시킨 것이었다. 비록 학술단체가 아니라 영리를 목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길을 나설 때 마다 전문 지식을 갖춘 강사들을 동행시켜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였으니 인기는 자못 대단했었다. 나와 그니와의 인연도 두어 차례 강사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만 삼년을 넘기는가 싶더니 불현듯 그만 접는 것이 아닌가. 그 까닭은 엉뚱하게도 옷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그니가 내 작업실을 찾아와 분주하게 책을 뒤적이다가 “형, 돌실나이라는 이름 어때”라며 총총 사라지더니 얼마 후 그 이름이 생활한복의 브랜드가 되어 세상에 나왔었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사업이라는 것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나로서는 관심이 뜸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인 지난해에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돌실나이’라는 브랜드는 친구에게 넘기고 자신은 다른 브랜드를 출시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잠시 인사동을 떠나 있기도 했단다. 외국 명품들의 각축장인 강남에서 한국적 소재와 이미지를 차용하여 디자인한 부띠끄를 열었으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꿈이 컸으니 투자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소위 말하는 빈털터리가 되어 강남을 떠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쉬며 절치부심한 끝에 새롭게 선보이는 브랜드의 네이밍을 비롯, 브로셔의 사진작업이며 디자인을 거들어 주던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니가 만든 옷의 반 이상은 흰색도 아니며 서양 개념으로 베이지도 아닌 묘한 색이다. 곧 소색(素色)이다. 그것은 우리민족을 일컬으며 백의민족이라고 할 때의 흰색을 일컫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흰색은 아니다. 소색은 다른 색을 덧입히지 않은 명주실로 옷감을 짰을 때 나오는 실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오묘한 색이다. 그 소색에서 표백을 하면 우리들이 말하는 흰색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소색은 영어로 번역할 때 별달리 지칭할 만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자연의 색(natural color)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색이기도 하다.

마침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가져갈 것을 다림질하며 평소 엄마 노릇 못해 미안해했다.
마침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가져갈 것을 다림질하며 평소 엄마 노릇 못해 미안해했다.
몸에 좋은 천연섬유만

결국 그니는 아무런 가공을 하지 않은 느낌의 색을 즐기는 셈이다. 치색(淄色)이라고 하는 검은 색은 먹물로만 염색을 한다고 했다. 그 농도에 따라 진하거나 회색이 될 뿐 가능한 한 화학염료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옷감 또한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이 오로지 천연섬유만을 고집한다. 선조들이야 그것 밖에 없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요즈음과 같이 온갖 첨단 섬유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구태여 그럴 까닭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더구나 옷감의 선택은 디자인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고 색상과 디자인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들로 하여금 구매욕을 불러일으켜 매출의 증대에 많은 영향을 끼칠 텐데도 말이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단호하며 단순했다. 그것이 사람의 몸에 좋다는 것이 그니가 내세운 이유의 전부였다. 덧보태 자신이 옷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까닭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끈을 놓치기 싫어서란다. 그와 상생하지 않는 삶을 꿈꿔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이 매만지는 모든 것들은 자연에 근거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것이 오히려 그니가 나에게 되물은 말이었다. 그 말은 곧 유행에 민감한 패션분야이지만 자신만큼은 유행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 되어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니를 만난 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 때문은 아니다. 그니가 조금씩 세계를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디자인한 옷을 가지고 말이다. 그니의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옷장에는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입던 옷들이 빼곡하게 개켜져 있었다. 언뜻 보면 호사가들의 콜렉션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단순한 수집이 아닌 연구용이었다. 연구라야 꼼꼼히 들여다보며 살피는 것이 고작일 수 있지만 그니의 매운 눈썰미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톺아보며 얻은 것들은 지금 만드는 옷에 덧보태거나 빼지 않은 채 적용된다. 옷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외국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내세우는 옷의 활동성이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옷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농경민족이었던 선조들의 옷은 거친 노동에도 불편함이 없어야 하므로 전문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어머니나 할머니들일지라도 활동성 하나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옷을 지어야 했던 셈이다. 그것을 그니는 본받는다. 소매 자락을 이루는 선도 놓치는 법이 없고 겨울이면 누비의 아름다움과 따뜻함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듯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선조들의 지혜에다가 모던한 도시의 감수성을 덧 입혀 옷을 만든다. 그 덕에 자칫 그니가 만든 옷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니는 전통과 현재를 적절하게 중재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그것 또한 그니가 올곧게 말하는 자연과의 상생과 다를 바가 없다.

선조의 지혜 ‘활동성’ 본받아

만나는 내내 그니는 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우리들의 지나간 과거에 대해 긴밀한 천착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세상을 상대하거나 미래에 대해 더 없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참으로 고마웠다.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무턱대고 우리들이 지녔던 문화가 빛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해야 할 무엇도 아니며 외국의 그것들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조곤조곤 말하고 있으니 어찌 곱게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을 가꾸고 매만져서 만든 자신의 옷을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까지 입히겠다니 또 어찌 고마운 생각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니와 헤어진 뒤 다시 인사동을 걸었다. 눈에 띄게 많아진 외국인들, 그들의 손에도 바리바리 우리들의 문화가 듬뿍 담긴 쇼핑백들이 들려 있었으면 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들의 것을 부러워하며 사기만 할 때는 아니지 싶은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팔 것인가. 나는 그니에게 해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책상머리를 떠나지 말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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