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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역시 조폭언론?

등록 2005-11-24 18:13수정 2005-11-25 14:16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자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홍 전 대사를 구속수사하라’며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자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홍 전 대사를 구속수사하라’며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기자는 완력 휘둘러 사주 보호하고 데스크는 투철한 ‘직업정신’이라며 억지 논리 수구언론 윤리수준 보여준 코미디 같은 장면 ‘룰’ 어겼다는 이유로 사적 응징 정당하다면 국민과 ‘신사협정’을 깬 이건희·홍석현이 1순위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사주와 ‘경호원 기자’

요즘 ‘경호원 기자’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 전 주미 대사가 검찰에 출두할 당시 기습 시위를 벌인 민주노동당 당원을 완력으로 제지했던 중앙일보 사진부 김아무개 기자의 행동에 대해 사진부장이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말인즉, ‘포토라인’이라는 룰을 둘러싼 ‘신사협정’을 깬 것에 대한 직업적인 ‘응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논란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본다. 논란의 초점은 경호원이란 표현인데 이 표현이 잘못된 것이다. 대개 경호원은 경호받는 사람을 둘러싸고 서 있는 위치라든가 옷차림새 등으로 봐서 저 사람은 경호원이구나 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주를 위해서 예측 불가능한 폭력을 썼다는 점에서 나는 그 기자를 경호원이 아니라 구사대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사대란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막 일어날 때 회사쪽에서 동원한 테러 집단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구사대가 했던 일은 노동자들의 파업 농성이나 시위 현장을 폭력으로 짓밟는 것이었다. 그때에 어떤 재벌그룹의 구사대는 식칼을 동원하기도 했다.

우선 작은 것부터 따져보자. 누군가가 포토라인을 침범할 때 사진기자가 그 사람을 완력으로 제지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당연히 없다. 중앙일보의 사진부장이 사례로 든 ‘88올림픽’에서의 일이라는 것도 사진기자라는 동업자끼리 통하는 룰에 불과하다. 그것은 취재 현장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통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진기자란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 전쟁터에서는 총알과 맞선 채 목숨을 걸고 일한다. 평시에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많은 경우 자기 몸보다 우선 카메라를 보호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카메라를 위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취재 현장에서 거친 몸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포토라인이 침범되면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취재 현장에서 취재원에게 완력을 휘두르는 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포토라인 깨면 완력으로 제지?

어떤 점에서 현장 사진기자 일이라는 것은 매우 잔인하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광경을 보더라도 인정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일단 먼저 셔터를 눌러야 하는 게 사진기자의 직업정신이다. ‘구사대 기자’가 참된 사진기자였다면 완력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지면에 실릴 사진을 통해 신사협정을 깬 사람을 응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진기자가 행하는 본령의 응징 방식이다.

중앙일보는 자기네가 한국의 일류신문이라고 선전해왔다. 이 선전이 타당한가와는 별개로, 소위 일류신문의 사진기자가 구사대원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사진 데스크의 책임자가 구사대장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 한국 수구언론의 윤리적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 시야를 크게 넓혀 따진다고 하더라도, 중앙일보 사진기자는 자신의 완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엉뚱한 사람을 향해서 쓰고 있음이 확실하다. 사진기자가 지면에 실릴 사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완력을 행사해서 직업적 일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은 비상 시국이다. 이런 비상 시국에서 사진기자가 굳이 자신의 팔힘으로 누군가를 응징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이건희와 홍석현이다. 그들이야말로 사회 전체의 룰을 위반하고 국민들과의 신사협정을 깬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재벌 기업이 정치인들과 검사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검은 돈을 뿌렸고 한국 일류신문의 사주가 이 검은 돈을 전달하는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는 것, 게다가 전달해야 할 매형의 돈 일부를 치사하게 자기가 떼어먹었다는 혐의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혐의를 둘러싼 법적 공방이 막 벌어지려는 현장에서 언론 사주에게 고용된 사진기자가 자신의 사주를 위해서 완력을 썼다. 그리고는 반성하기는커녕 억지 논리를 늘어놓는다. 포토라인이라는 룰을 위반해서 사진기자가 직접 나서서 완력으로 응징을 했다는 거다.

이런 억지 논리를 연장시킨다고 하면 당연히 이건희와 홍석현도 법적인 공방을 거치지 않고 완력으로 응징해야 한다. 왜냐면 그들은 윤리와 법이라는 국민적 룰을 어긴 데다가 녹음된 자신들의 목소리에 의한 혐의를 파렴치하게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신사’들이 아니다. 신사 협정을 어긴 것에 대한 응징이 완력으로 뒤에서 목을 나꿔채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사도 아닌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은 그들을 거꾸러뜨려서 구둣발로 짓밟고 방패 따위로 머리를 내려찍고 몽둥이로 마구 패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1980년대에 노동자들이 당했듯이 말이다.

나는 중앙일보 기자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자신들의 직장이 위기에 빠져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사주를 보호하려는 심정도 이해한다. 신문사, 더욱이 대한민국 일류 신문사인 만큼 큰 권력을 갖고 있으니 그 권력을 부당하게 동원해서라도 사주를 보호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조직폭력배가 아닌 다음에야 여기에는 엄연히 룰이 있다. 사진기자의 경우 룰은 어디까지나 사진으로써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젖혀두고 완력을 쓴다는 것은 사진기자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사진기자는 사진으로 말해야

룰을 위반한 것에 대한 사회적 응징에는 도덕적 비난에서부터 법적인 제재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중앙일보의 사진기자는 몸소 자신의 완력으로 응징했다. 그리고 그 기자를 감독해야 할 책임자는 이 응징에 대해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를 댄다. 단지 직업정신에 투철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사대가 아니라 직업정신에 투철한 기자들이라고 한다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직업정신에 의한 완력을 이건희와 홍석현을 향해서도 행사해야 마땅할 것이다. 설령, 1980년대에 구사대가 행사했던 물리적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고 한다면, 선배 사진기자들이 화염병과 짱돌이 날아다니는 현장에서 구사대의 폭력 현장을 찍어낸 사진들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선배 기자들은 바로 이런 사진 한 장을 얻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백골단이나 구사대에게 맞기도 하고 때로는 카메라를 빼앗기기도 했고 심지어는 카메라가 파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민주화라는 것은 일정 부분 헌신적인 사진기자들 덕분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그들의 억지 논리에 따라 직업정신을 발휘하기로 친다면, 즉 룰을 어긴 이건희와 홍석현을 그들 스스로 몸소 굳이 완력으로 응징하기로 한다면, 그 가정된 사건 현장에서는 민주노동당원들이 깜짝 시위를 하지 않고 포토라인 안쪽에서 편안하게 그들 대신에 셔터를 누르고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건희와 홍석현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설령 그들의 혐의가 법정에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제멋대로 완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교도소가 따로 있는 것이다. 법적 기관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완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게 사회 전체의 룰이다. 그런데, 그 사진기자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에 자신의 나머지 다른 팔을 사용해서 사회 전체의 룰과 사진기자의 룰을 동시에 어긴 것이다.

이재현/작가
이재현/작가
이 패륜적 범법 행동을 어떻게 응징해야 하는가. 중앙일보의 방식과 논리 대로라고 한다면 곧바로 나 자신의 완력으로 응징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 팔로 컴퓨터 자판을 들고 다른 팔로는 그 기자의 목을 뒤에서, 더 정확히는, 글쓰기 위해 취재하는 척 하고 숨어 있다가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목을 확 나꿔채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이것이 직업정신에서 행한 것이라고 변명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분노를 삭히면서 글로 응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나는 맞는 노동자가 될지언정 패는 구사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패륜적 범법 집단인 구사대 역할을 자임하는 수구언론과 나머지 국민이 진정한 신사협정을 맺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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