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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핏빛 바다, ‘곤을동’에 가신 적이 있나요

등록 2021-04-02 18:59수정 2021-04-03 02:36

1949년 1월4~5일 초토화된 제주시 곤을마을
“하늘이 벌겋게 타올랐고, 바다는 핏빛이었어”
‘4·3 잃어버린 마을’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흔적
제주 4·3 때 폐촌된 제주 곤을동.
제주 4·3 때 폐촌된 제주 곤을동.

지난달 26일 오전, 제주시 화북동 오현고를 옆으로 끼고 들어간 곤을동에는 올레 도보 여행객들이 두세명씩 무리를 지어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는 노란 유채꽃과 흰 벚꽃들이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색과 어울려 흔들거렸다. 여행객들은 길가 한쪽에 붙은 ‘4·3 유적지 곤을동’이라는 표지판을 보며 하천 건너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화북천이 바다 가까이 와서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천 안쪽을 ‘안곤을’, 하천 사이 마을을 ‘가운뎃곤을’, 하천 바깥에 있는 마을을 ‘밧곤을’이라고 부른다.

제주 곤을동이 해안가와 맞붙어 있다.
제주 곤을동이 해안가와 맞붙어 있다.

1949년 1월4일. 세찬 바닷바람이 별도봉 아래 22가구가 모여 사는 안곤을로 파고들었다. 파도와 바람을 막기 위해 높게 쌓은 돌담을 뚫고,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올레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갔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날씨였다.

어스름해질 무렵, 강한 서북풍을 따라 불길이 마을을 덮쳤다. 이 마을 출신 김용두(93)씨의 말이다. 가난했지만 평화롭던 마을은 삽시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군인들은 횃불을 들고 다니며 초가집마다 불을 질렀고, 청년들이 보이면 잡아다 마을 앞바다 ‘드렁’에서 학살했다. 해안마을이 초토화된 경우는 드물다.

김씨의 두살 위 형 김병두(당시 23살)도 이날 희생됐다. 마을 주민 10여명도 같은 날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의 집이 먼저인지도 모르게 옹기종기 붙어 있던 초가집들이 순식간에 ‘와다닥 와다닥’ 소리를 내며 탔다. 하늘이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 나중에 김씨의 아내가 된 화북1구 서부락 양옥자(89)씨도 안곤을이 벌겋게 타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제주 곤을동 출신 김용두씨가 자신의 고향 마을 터 앞에 서 있다.
제주 곤을동 출신 김용두씨가 자신의 고향 마을 터 앞에 서 있다.

안곤을에서 김씨네만 갖고 있던 말구르마(수레)도 불에 탔고, 제주 서쪽 더럭마을에서 사온 황소도 불에 탔다. 어머니(김기업)는 불이 타는 집에서 세간살이를 꺼내지 않았다. 어린 딸 셋이 죽으면 이불로 싸서 묻겠다는 생각에 이불만 꺼냈다고 했다. 안곤을은 화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외지에서도 못사는 사람들이 안곤을로 왔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해초인 듬북(뜸부기)과 멸치가 흔해 이를 주워다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 컸다.

16살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생선 장사를 하며 재산을 일구고 해방 직전 고향으로 돌아와 ‘새부자’(신흥 부자)라는 별명을 얻은 아버지(김자윤·당시 49)는 마을이 초토화된 날 군인들에게 연행됐다가 이튿날인 1949년 1월5일 화북 바닷가에서 주민들과 함께 학살됐다. 이날은 결혼한 지 한달밖에 안 된 김용두씨의 첫번째 아내(이기봉)도 화북 친정집에 갔다가 주민의 모함으로 경찰에 희생됐다.

곤을마을 올레 흔적.
곤을마을 올레 흔적.

“바닷물이 핏물로 벌겅해나수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였으면 그 시체들이 바다에 끌려갈 뻔했다고 합니다.” 양씨는 당시 안곤을에 살던 친구한테 들었다며 “토벌대가 집마다 불을 붙이며 젊은 사람만 있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잡아다가 바닷물이 찰락찰락(철렁철렁) 치는 데 세워 놓고 쏘았다. 썰물 때였으면 시체를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마을이 불타기 직전 피신해 인근 마을에서 이 모습을 보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중산간 마을인 서회천에서 2~3개월 피신 생활을 하다가 귀순해 제주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석방됐다.

이날 별도봉 산책로와 이어진 안곤을 입구에 들어서자 2004년 제주민예총이 해원상생굿을 하며 세웠던 방사탑과 옛 마을 모습을 그린 조감도가 보였다. 안곤을은 4·3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로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 가운데 당시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마을이다.

새부잣집이었다는 김씨가 자신이 살았던 집터를 가리켰다. 김씨는 “울담이나 입구도 그대로야. 초가여서 불에 타서 없어진 것 빼고는 그대로야”라고 말했다. 김씨는 70여년 전으로 돌아간 듯 바다를 바라보며 “멜(멸치) 후리는(잡는) 후리터가 2곳이 있었다. 한곳에 40명 정도 조합원이 구성돼 ‘멜 들어왐쪄’ 하면 나가서 멜을 잡아 나눴다. 멜을 말려서 보리갈(보리농사할) 때는 하나씩 멜을 흘려두면 좋은 거름이 된다. 바람이 불면 갈치 등 바닷고기가 뭍으로 올라와 주워다 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곤을동 집터의 아궁이 흔적이 보인다.
곤을동 집터의 아궁이 흔적이 보인다.

김씨의 집은 다른 집보다 입구가 크고 집터도 컸다. 입구 바닥을 자세히 보니 오래된 사기그릇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돌담과 돌담 사이 올레에는 큰방가지똥, 큰봄까치꽃 등이 자라고 있었다. 바람이 올레길 사이를, 멀구슬나무와 벚나무 사이를 돌아 돌담 구멍을 쓸고 지나며 소리를 낸다. 풀잎들은 방향을 잡지 못한 바람에 시달리며 흔들렸다.

올레와 집터 곳곳에는 큰 바위가 걸쳐 있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안곤을 사람들이 그려졌다. 집터 마당에는 자주괴불주머니, 큰봄까치꽃과 유채꽃이 여기저기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러이 흩어진 돌담과 그 사이 자란 풀들은 가난하게 살다 간 마을 사람들 때문인지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흙이 되어 잠든 이웃들을, 바람은 서럽고 억울한 추억으로 흔들어놓는다.

모든 것이 불에 탄 자리에는 어쩌다 바람에 날린 멀구슬나무 열매가 돌담과 돌담 사이에 떨어져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라고 있었다. 김씨에게 70여년 전 젊은 시절은 소 먹이러 다니고, 안곤을 태역밭(풀밭)에서 해진 양말에 헝겊을 잔뜩 집어넣고 친구들과 공놀이를 했던 봄날의 바람 같았다.

제주시 곤을마을 터.
제주시 곤을마을 터.

도깨비쇠고비가 올레 돌 틈 사이에서 칡넝쿨과 함께 얼기설기 엮이며 돌담을 보호하고 있었다. 안곤을 올레길을 걷는데 멧비둘기가 눈높이보다 낮게 날아가고, 뒤이어 동박새가 날아갔다. 집터 흔적 사이에서 옛 화장실인 ‘돗통시’와 아궁이로 사용했던 흔적도 보인다. 말방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김씨는 “아직도 누군가 말방아를 가져가지 않은 게 신기하다”고 했다.

70여년 전 벌겋게 물들었던 검푸른 바다는 여전히 철썩인다. 돌담 가의 풀들은 거친 바람에 뽑힐 듯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다.

안곤을 마을을 바라보던 김씨 부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집터들이 대부분 외지인에게 팔렸어. 우리한테도 팔아달라고 왔었지만 거절했어. 언젠가는 외지인에게 전부 넘어갈 것 같아.”

4·3의 역사를 간직한 흔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개발 바람은 4·3 유적지를 아예 없애버리거나 크게 훼손하고 있다. 안곤을에도 펜션이나 카페가 들어설까.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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