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언 전 제주도의회 의장이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지에 있는 형의 표석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
70여년 동안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렸다. 짧은 만남 뒤 영원한 이별을 한 아내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들딸, 그리고 형과 오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마음에 담고 있는 동생들이 그 문을 열어젖혔다. 어머니는 아들을, 아내는 남편을 만났고, 아들딸은 평생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다.
제주지방법원에서 2020년 하반기부터 2021년 3월16일까지 이어진 ‘수형 행불인’(4·3 당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은 한 편의 대서사극이자 장편 다큐멘터리였다.
“91살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는 상군 해녀였습니다. 매일 바다로 나갔습니다. 동네 삼촌들이 ‘맨날 바당에 가는 게 지치지도 안 허우꽈’(매일 바다에 물질하러 가는 일이 지치지도 않나요?) 하면 ‘아니여. 나 아들 만나래 감쪄’(아니야. 아들 만나러 간다) 했습니다. 물속에 아들을 찾으러 갔는지, (땅에) 묻지 못해서 찾으러 갔는지 모르지만 ‘나 아들 만나래 감쪄’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 오늘 하늘나라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장정언(86) 전 제주도의회 의장은 지난달 1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수형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형이 무죄 판결을 받자 이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매일같이 ‘아들(장무언·당시 20살)을 만나러’ 바다에 나갔던 어머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구순이 넘어 눈을 감았다.
제주지방법원이 지난달 16일 4·3 수형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뒤 환영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4·3 당시 제주지역의 유일한 언론사인 제주신보사에 다니던 형은 1948년 12월4일 군사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행방불명됐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리워 날마다 물질로 한을 달랬다. 장 전 의장은 4·3평화공원에 갈 때면 늘 행방불명인 자리에 있는 형의 표석을 찾아 큰절을 올린다.
그는 기자에게 “형님뿐 아니라 어머니도, 나도 70여년 동안 서로 다른 감옥에 있다가 비로소 나왔다. 형님은 20년이 아니라 70여년을 감옥에 계셨다. 이제야 우리 가족이 상봉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제주지법에서 335명에 이르는 수형 행불인 유족들이 제기한 재심 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은 4·3 유족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희생자들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법으로 덧씌워졌던 ‘빨간색’을 70여년 만에 법정에서 지운 이들에게 73주년 4·3의 봄날은 더 특별한 날로 다가온다. 희생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은 희생자와 유족들을 옥죄었던 법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6살 때 아버지가 형무소로 간 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는 이미자(79·제주시 노형동)씨는 밤새 써 온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남모르게 많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어린 마음에 원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꿈에서라도 한 번 뵌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꼭 한 번만이라도 뵙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말젯(셋째) 아버지의 아들인 사촌 동생을 입양했지만, 족보에만 올리고 호적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연좌제 때문입니다.”
양자로 입양한 사촌 동생이 혹시나 ‘연좌제’ 피해를 볼까 봐 이씨 어머니는 그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이씨의 아버지(이상협)는 1948년 12월28일 징역 15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됐다. “복역하는 죄수들을 끌어다 매몰하였다고 하니 그런 만행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그 무서움, 고통과 괴로움, 그 험난함은 말할 수가 없었겠지요. 목 놓아 불러보는 아버지, 아버지 이름. 이제는 모든 걸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셨으면 합니다. 이제 아버지의 딸로서 한을 풀게 돼 감사합니다.” 복받치는 듯 이씨는 연신 울었다.
재판이 있는 날이면 법정은 산 자는 물론 죽은 자들의 기억투쟁 장이 됐다.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은 배우자와 아들딸, 형제자매들의 입을 통해 70여년 전 있었던 불법적인 재판과 그 속에 감춰진 4·3의 진실을 법정으로 불러냈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입을 빌려 그렇게 법정에서 진실을 증언했다. 법정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아들딸들이, 형제자매가 희생자의 대리인이 돼 야만의 시대를 증언했다.
재심에 참여한 올해 101살의 현경아 할머니는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하면 될거우꽈. 이승만이라고 하면 될거우꽈. 지금도 가장 원한이 남는 게 그 사람이 몇년 형을 내렸으면 그 기간이 되면 남편을 내쳐야지(석방해야지) 자기네 모음냥(마음대로) 죽일 수가 이수꽈”라고 했다. 현 할머니의 남편(오형률)은 1948년 가을 밭에서 일하다 경찰에 연행됐고, 형무소 수감 생활 중 행방불명됐다.
아들과 함께 법정에 온 손민규(88)씨는 “아버지는 잘못이 없다며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다 경찰의 총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특공대에 돌아가셨다”며 “함덕지서에 잡혀 있던 오빠가 20여명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제주시내 주정공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 ‘오빠’ 하고 부르자 오빠는 울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오빠를 본 마지막 모습이다. 고구마를 들고 주정공장에 면회를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때 일이 가슴에 못이 박혀 살았다”고 말했다.
정태혁(87·서귀포시 대정읍)씨의 아버지는 1948년 11월 경찰이 집마다 1명씩 나오라고 해 총살할 때 희생됐다. 피신해 있던 형(정태석·당시 19살)은 남은 가족이 피해를 볼까 봐 자수했지만 형무소로 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4·3 이후 검푸른 바다처럼 막막했던 유족들의 삶은 생존투쟁이었다. 아버지가 마포형무소로 간 뒤 행방불명되고 어머니와 갓난 동생은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은 강방자(79·제주시 조천읍)씨는 “생후 8개월 된 남동생을 업고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던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졌는데 남동생이 죽은 엄마의 젖을 빨아 먹었다”며 “4·3이 끝나고 나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함덕리에서 대흘리가 한참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언니들을 따라다니면서 조팟(조밭)에 검질(김)매러 다녔다”고 했다. 김삼수(86)씨의 어머니는 남편과 두 아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집이 불탄 뒤 삶이 어려워 남동생을 이모 댁으로 보내고, 여동생은 남의 집으로 보냈다. 두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형무소에서 피멍이 든 채로 돌아온 남편은 얼마 살지 못했다.
법정에 나올 때 두려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채지형(73·제주시 회천동)씨는 “무슨 근거로 아버지를 끌고 가서 15년을 선고하고 학살했는지 묻고 싶다. 감당한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어머니는 스무살에 저를 낳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 일만 하시다 돌아가셨다”고 말해 방청객들을 울렸다.
김진호(78·제주시 이호동)씨는 “4·3 때 모든 것이 불타 죽도록 고생했다. 17살 때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서울에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잘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대로 직장 다니면서 만족한 생활을 했다”며 “이민을 가려고 하다가 ‘3대독자인데 가면 되느냐’고 해서 고향으로 왔다”고 했다. 부금자(82)씨는 “고랑 뭘 하나”(말해서 뭣 하나)며 “삶이 힘들었다. 보리체(보리쌀 겉껍질)를 쪄서 쑥을 버무려 범벅을 만들고 사카린을 넣어 먹었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진술했다. 유족들은 법정에서 “살암시난 살았다”(살고 있으니까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에 동백꽃이 피었다.
재심 재판에 참여한 335명의 사연은 335개나 될 정도로 다양하다. 점심을 먹다가 끌려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되고(강재철),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끌려가 총살(고남표)됐는가 하면 자수 전단을 보고 자수했다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고민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자수했지만 가족과 영원한 이별(홍군옥)을 하게 됐으며, 동명이인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경우(김덕윤)도 있다.
유족들에게 법정은 ‘해원’의 무대였고, 가슴 켜켜이 쌓여 피멍울이 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무대였다.
4·3 이후의 삶이 더 힘들었던 임춘화(76)씨는 4·3 때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어머니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육지에서 온 경찰을 따라 육지로 떠난 뒤 홀로 남겨졌다. 임씨는 “엄마 생각에 하늘만 보면 눈물이 난다.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이 말 하려고 오늘까지 산 것 같다. 내일 죽어도 한이 없다”며 증언석에 앉으락 서락 당시를 설명하며 말을 이어가자 방청객들은 숨을 죽였다. 중산간마을인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출신 허순자(77)씨는 “너무 억울하게 살아왔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4·3 유족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바탕으로 유족들이 마음껏 진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무죄 판결을 선고하면서 “피고인(희생자)들이 얼마나 법정에 오고 싶어 했을까”라며 “오늘 피고인들은 대한민국 법원을 통해 법적으로 당당하게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법원의 ‘무죄’ 선고가 이들이 평생 겪었던 고통과 한을 한꺼번에 보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짐은 어느 정도 내려놓게 해줬다. 한 유족(83)은 “처음부터 보상은 바라지 않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바랄 뿐이었다”며 “한편으로는 무척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지 허탈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족(80)은 “무죄 선고를 받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너무 좋았지만 그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멍울이 풀어진 것 같지는 않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절반은 풀렸다”며 웃었다.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국가기록원)에서 발굴된 ‘수형인 명부’상 4·3 때인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은 2530명(사형 집행 280여명 포함)이다. 이번 재심 청구소송을 제기한 유족은 335명이다. 앞으로 재심 청구소송이 가능한 수형인은 2천명 이상이 남았다.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 전부개정 법률안은 유족들이 일일이 재심을 청구해야 하는 시간적, 경제적 불편함을 덜어주고, 유족이 없는 수형인들도 재심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은 수형인에 대한 특별재심 조항을 신설해 총리실 산하 4·3위원회가 일괄해 직권 재심 청구를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하면 법무부 장관이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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