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제주

[제주 4·3] “기관총이 ‘따다닥’ 허민 탁 박아졍 죽어부는거라”

등록 2021-04-02 17:59수정 2021-04-03 02:36

총성 울리던 비학동산의 그날…남겨진 사람들
‘화해와 상생’ 상징 한편엔 아픈 진실
어린 나이에도 외면한 반인륜적 만행
가족의 절멸…살아남은 자들의 투쟁
화가 강요배가 비학동산의 비극을 그린 작품 <부모들>(1992).
화가 강요배가 비학동산의 비극을 그린 작품 <부모들>(1992).

지난해 4월3일 제72주년 4·3추념식 참석차 제주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영모원을 찾았다. 위국열사와 호국영령, 4·3희생자 위령비가 한데 있어 ‘화해와 상생’의 상징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 하귀 학원동(개수동)에 비학동산이 있다. 학이 난다는 뜻의 비학동산(비애기동산)에는 ‘화해와 상생’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4·3의 진실이 있다.

1948년 12월10일 오전, 여러 대의 트럭이 동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일주도로)를 따라 제주 서부지역 애월 하귀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트럭들은 학교를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라산 쪽으로 향했다.

제주4·3 당시 비학동산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용렬씨가 현장을 찾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4·3 당시 비학동산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용렬씨가 현장을 찾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하귀 개수동에 내린 군경, 우익단체원들로 구성된 토벌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폭낭(팽나무)이 있는 비학동산으로 내몰았다. 7살 김용렬(80)의 집에서는 어머니(강중윤)가 아침 식사를 대충 끝낸 뒤 “혼저 글라(빨리 가자). 오랜 허난 제기 안 가민 두드려분다”(오라고 하니까 빨리 안 가면 때린다)며 어린 자녀들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갓난 막내 여동생을 업고, 3살 남동생(용구)을 목말 태운 뒤 양손에는 김씨와 둘째 춘렬(당시 5살)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마을 뒷산 가세기동산에 토벌대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는 청명했다. 동산에서는 마을이 훤하게 보여 도망갈 수 없었다.

비학동산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김용렬씨.
비학동산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김용렬씨.

김씨는 국방색 옷을 입은 토벌대를 ‘육지 군인’으로 기억했다. 어머니가 “아이고게. 산에 낭허래 간 사람덜은 어떵헙니까”(산에 나무 구하러 간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하고 토벌대에 물었다. 김씨는 “그 사람들이 어머니가 하는 제주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느냐”며 “어머니 말에 산에 간 폭도로 생각했는지 우리보고 ‘도피자 가족!’ 하고 외쳤다”고 말했다. 아버지(김기전)는 닷새 전인 12월5일 아침 일찍 외도지서에서 땔감용 나무를 구하러 가야 한다며 도시락을 들고 오라는 명령에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나선 뒤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아버지는 12월9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으나 행방불명됐다.

경찰은 비학동산 한쪽 편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먼저 온 주민들도 두려움 속에 앉아 있었다. 팽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앉으라고 한 뒤 어머니 손을 뒤로 묶었다. 김씨와 동생들도 옆이나 앞으로 앉았다.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려고 줄줄이 베줄로 묶었다. 다른 편에는 줄에 묶이지 않은 주민들이 앉아 있었다. 동생이 오줌이 마렵다고 보챘다.

김용렬씨가 비학동산 학살사건 당시 팽나무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김용렬씨가 비학동산 학살사건 당시 팽나무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김씨는 어머니의 등에 달라붙어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묶여 있던 베줄을 풀더니 토벌대원이 한눈을 파는 사이 살그머니 김씨와 동생들을 데리고 오줌 누이러 동산 옆 구렁진 곳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뒤 몰래 다른 편 줄에 앉았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김씨 가족은 그렇게 살아났다.

토벌대는 앉아 있는 주민들을 향해 “잘 보라”고 윽박질렀다. 베줄에 묶였던 사람들이 줄을 풀고 나가면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지금의 동민회관 마당이다. “기관총이라는 게 ‘따다닥’ 소리 나는 겁디다. ‘따다닥’ 허민 탁 박아졍 죽어부는거라.” 주검은 길 건너 밭으로 내던져졌다. 이날 1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남녀노소 20명 이상이 집단학살됐다. 겁에 질려 발발 떠는 동생들의 코에서는 피가 ‘잘잘’ 쏟아졌다.

이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더 충격적인 만행이 자행됐다. 토벌대는 팽나무를 “잘 보라”고 소리쳤다. 두려움에 떠는 주민들의 눈이 팽나무를 향했다. 팽나무 앞에는 임신 8개월 정도 되는 여성이 온몸을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토벌대는 임신부를 발가벗기고 쉐얏베(소등에 짐을 실을 때 동여 묶는 꼬아진 밧줄)를 양쪽 겨드랑이에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잡아당겼다. 2~3명의 토벌대는 철창으로 그 여성을 찔렀다. 토벌대는 여성이 집에서 늦게 나왔다며 “제대로 보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죽인다”며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만 보고 외면했다. 어린 나이에도 더는 볼 수 없었다.

강석붕씨가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집이 불탄 뒤 집터에 남았던 주춧돌을 가리키고 있다.
강석붕씨가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집이 불탄 뒤 집터에 남았던 주춧돌을 가리키고 있다.

“돼지를 나무에 달아매듯 묶어서 잡아당기니까 위로 올라가더라”고 말한 김씨는 “비명은커녕 주민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날 비학동산 사건 때문인지 자라면서 넋이 나간 것처럼 자주 아팠다. 비학동산을 넘어야 물을 길어 오는데 겁이 나서 다니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학동산 학살’이 벌어진 그날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 울타리에 달라붙어 토벌대 트럭을 보며 손을 흔들었던 하귀국민학교 3학년 강석붕(84)씨 가족은 용케 이날 화를 면했다. 그의 집은 비학동산에서 200여m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44일 뒤인 1949년 1월23일 집안이 초토화됐다. 경찰이 들이닥쳐 숙부를 끌고 가려 하자 할머니가 “왜 내 아들을 끌고 가느냐”며 맞섰다. 해방 이후 마을 구장과 중학교 창립이사를 지내는 등 사회활동을 하던 아버지(강봉희)는 도피 생활을 하던 때였다. 서청 출신 외도지서 경찰들은 “작은아들은 두고 갈 테니까 어머니가 가야겠다. 큰아들(아버지)을 내놓으라”며 할머니(김정)를 끌고 가다 길가에서 총살해버렸다. 할머니와 함께 끌려간 갓난 여동생(영주)을 업은 어머니(김정복)는 외도지서까지 갔다.

이날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던 강씨의 누나는 ‘폭도 자식’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비학동산에서 경찰에게 학살됐다. 경찰은 비학동산 인근에서 주민들을 세워놓고 학살했다. 누나의 나이 18살이었다. 아버지가 “내년엔 시집을 보내겠다”던 누나는 그렇게 떠났다.

다음날 새벽 한 청년이 마을에 와 “어제 외도지서 간 사람들에게 밥을 제공할 사람들은 따라오라”는 말에 강씨는 할아버지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그 청년과 함께 외도지서까지 갔다. ‘어머니!’ 하고 불렀지만 보이지 않아 돌아왔다. 수소문하던 큰고모가 나중에 ‘어머니는 동생을 업은 채로 외도국민학교 서쪽 구덩이에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날 저녁 피신했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가족과 친척들을 데리고 유수암의 곶자왈로 피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동으로 귀순했다. 강씨 형제들과 아버지의 인연은 그곳에서 끝났다. 아버지는 1949년 7월2일 군사재판에서 7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행방불명됐다. 사건 이후 고모 집에 살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친구들로부터 ‘폭도 새끼’라는 놀림을 받아 학교를 그만뒀다.

제주4·3 당시 비학동산에서 누나를 잃은 강석붕씨가 4·3 이후 집 앞에 심은 팽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제주4·3 당시 비학동산에서 누나를 잃은 강석붕씨가 4·3 이후 집 앞에 심은 팽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강씨의 다섯살 여동생(수일)은 작은고모와 피신 생활을 하다 토벌대의 총에 맞았는데, 작은고모는 1949년 3월15일 숨지고 여동생은 가슴에 총알이 관통해 앓다가 13살 나던 해 어머니 제삿날 세상을 떴다. 강씨는 “어머니가 데려간 것 같아. 어머니 제사를 한참 지내는데 눈을 감았어”라고 했다.

주민들이 비학동산에 모여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으로 지목된 집들을 불태웠다. 김용렬씨의 집도 불에 탔다. 김씨 가족은 2㎞ 남짓 떨어진 해안마을인 가문동 친척 집으로 갔다. 이름도 없는 갓난 여동생은 제대로 먹지 못해 숨졌다. 아버지는 “육지 형무소로 간다”며 인편에 입고 갔던 갈적삼(감물 들인 옷)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옷을 방 안에 걸어놓고, “아버지 영혼이라도 배고프지 않게 해야 한다”며 매일 식사 때면 아버지 몫의 밥을 떠서 똑같이 밥상에 올렸다.

4·3 이후의 삶은 고단했지만 생활 의지는 강했다. 김씨는 공부하고 싶어 학교를 찾아가 다니겠다고 하고, 16살엔 공부하기 위해 부산의 공장에 취직해 10여년을 보냈다. 동생들과 토끼풀을 캐다가 삶아 먹고, 고등어 졸인 국물을 허벅에 받아다 먹기도 했다. 8살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밭일을 했는데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밭일을 나갔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울 져를이 어디시냐. 어디 시민 놈광 고치 이루후제 올테주기. 놈덜도 고치가신디. 한걸해야 운다.”(울 틈이 어디 있니? 살아 계시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훗날 오겠지. 남들도 같이 갔는데. 한가해야 운단다.)

수형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을 냈던 김씨는 지난달 무죄 선고를 받자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 같아 기쁘기는 하지만 마음이 다 풀어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같이 무죄를 선고받은 강씨는 “애초부터 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죄 선고로 명예회복은 됐다”고 했다.

강씨도 안 해본 일이 없다. 군대를 제대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억척스럽게 일하고 소를 키워 밭을 사면서 남만큼 살게 됐다고 말했다. 강씨는 꿈에 가끔 4·3 때 일이 나타난다고 한다. “잊으려고 애쓰는데 꿈에 나타나서 기분이 이상할 때가 많아. 학살하는 장면이나 곶자왈로 피신하는 장면도 나타나. 누님이나 우리 식구는 나타나지 않는데 4·3 때 일은 꿈에 나타나.”

비학동산 팽나무는 1990년대 말 동민회관을 지으면서 베어냈다. 70여년 전 학살의 현장이었던 동민회관 앞마당에는 보라색 꽃망울을 터뜨린 살갈퀴와 토끼풀이 봄바람에 하늘거렸다. 그 옆에는 벚꽃의 꿀을 빠는 동박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동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동산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는 한라산과 그 앞 어승생오름이 가깝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1.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2.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기차 말고 버스를 타라고요?”…열차운행 시작한 서화성역 가보니 3.

“기차 말고 버스를 타라고요?”…열차운행 시작한 서화성역 가보니

김영선 “살인자랑 한 버스 타면 나도 살인자냐” 명태균에 떠넘기기 4.

김영선 “살인자랑 한 버스 타면 나도 살인자냐” 명태균에 떠넘기기

모텔 입주 안산 6층 건물서 불…51명 구조, 2명 중상 5.

모텔 입주 안산 6층 건물서 불…51명 구조, 2명 중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