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군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과장이 2000년대 초 심어 복원에 성공한 구상나무림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지난 8일 오전 한라산 어리목 등산로로 접어들자 연둣빛 초록이 가득했다. 고로쇠나무, 졸참나무, 덜꿩나무, 산벚나무, 때죽나무 이파리들이 전날 내린 비로 한껏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날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를 포함해 국립산림과학원, 국립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생태원, 국립공원공단 등 국내 6개 기관이 참여한 ‘고산지역 기후변화 취약생태계 연구협의체’ 소속 전문가 20여명은 한라산 백록담 바로 아래 해발 1800m 장구목까지 답사했다. 멸종위기에 놓인 구상나무의 쇠퇴 및 복원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답사와 함께 현장토론도 진행됐다.
구상나무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산수종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2013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한 바 있다. 고정군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생물권지질공원 연구과장은 “한라산 구상나무는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대표적인 침엽수로 세계적인 희귀성이 있다”며 “특히 한라산 구상나무숲은 순림(純林·한 종의 나무로만 이뤄진 숲)에 가까워 주목받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태풍과 산사태 등 이상기후로 인해 고산지대 구상나무 쇠퇴가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해발 970m 어리목 등산로에 접어들자 서어나무숲이 보였다. 햇살이 뿌려대는 서어나무 사이로 이슬을 머금은 조릿대가 무성했다. “서어나무가 온대림 중 극상림(온대림 기후대의 마지막 단계)”이라는 고 과장의 말을 들으며 해발 1200m까지 올랐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면서 떨어낸 이슬이 후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해발고도와 관계없이 한라산 전역에 퍼져 있는 조릿대는 다른 식생들의 성장에 해를 끼친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는 터였다. 이상훈 연구협의체 운영위원장(국립생태원 소속)은 “조릿대 문제가 심각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해성 여부 판단은 쉽지 않다. 다른 식물 종과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라산 해발 1800m 장구목에 만개한 산철쭉이 백록담과 어우러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2006년, 2015년, 2021년(왼쪽부터)의 한라산 구상나무림 분포 및 밀도 변화. 소밀도(노랑) 중밀도(주황), 조밀도(빨강)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김종갑 연구사 제공
1시간30분 정도 오르자 해발 1600m 만세동산에 도착했다. 등산로 데크 오른쪽에 1m 높이의 녹색 그물 보호망이 쳐진 시험포장이 보였다. ‘학술조사’ 표시를 배낭에 매단 연구자들이 땀을 쏟아내며 발걸음을 옮기자 연둣빛 새싹이 돋아난 어린 구상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호망을 치지 않고 조릿대만 베어낸 곳에도 묘목이 있었지만 생육 상태는 부실했다.
이 구상나무들은 세계유산본부가 고랭지시험포(해발 700m)에서 7년 정도 키운 묘목을 옮겨 심은 것이다. 고 과장은 “2020년 이곳에 심을 때는 (키가) 10㎝ 정도였으나 지금은 5㎝ 정도 더 자랐다”며 “1천여그루 가운데 900여그루는 생존하고, 100여그루는 고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유산본부는 어리목 등산로 주변 만세동산과 사제비동산(해발 1400m), 영실 등산로 주변(1500m), 선작지왓(1700m) 등 4곳에 구상나무 묘목 1천그루씩을 여러 해에 걸쳐 심어 생육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구상나무 사이에 지난해 강풍에 쓰러져 고사한 구상나무들이 보인다. 허호준 기자
김종갑 세계유산본부 연구사(왼쪽)가 8일 한라산 만세동산에서 시험적으로 심은 구상나무 묘목을 보며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허호준 기자
답사에 함께한 국립산림과학원 소속 연구자들은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임효인 연구사는 “노랗게 변색한 구상나무는 양분 부족에 따른 피해를 입은 것 아니냐”고 했고, 박고은 연구사는 “잘 자란 개체도 많은데, 묘목을 심는 기준은 뭔가”라고 물었다. 전날 워크숍에서 한라산 구상나무 연구 논문을 발표한 김종갑 세계유산본부 녹지연구사는 “만세동산 시험지는 노루 피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지”라며 “비료를 주면 구상나무 조직이 연해져 바람이 불면 타격을 받는다. 극한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실험하고 있어서 비료를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한라산 구상나무의 평균 수령과 (나무와 나무 사이) 수간 경쟁은 언제부터 진행되느냐”고 물었다. 김종갑 연구사는 “영실 쪽은 평균 수령이 90년 정도 된다”며 “한라산 구상나무 29만4천그루 가운데 3천여그루에 대해 수간(나무 사이 거리)을 조사한 결과 1.798m가 나왔다. 20년 정도 되면 경쟁이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 쪽으로 20분 남짓 가자 왼쪽에는 지난해 강풍에 넘어져 고사한 구상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 연구사는 “이상기후 현상으로 고사하는 구상나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분홍색 산철쭉이 등산객들이 걷는 데크 너머로 봄빛을 뽐내고 있었다.
김 연구사의 전날 발표 자료를 보면, 한라산 구상나무림은 전체 면적이 2006년 796.8㏊에서 지난해 606.0㏊로 감소해 최근 15년 동안 190.8㏊(23.9%)나 줄었다. 태풍과 산사태 등 이상기후 현상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해발 1650m 지점에는 검은색, 초록색, 자주색 등의 열매를 맺으며 건강하게 자란 구상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연구자가 “생존목(건강하게 살아남은 나무)이 다른 지역보다 몰려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고 과장은 “2000년대 초 복원했다. 바위가 노출된 나지(裸地)에 구상나무 종자를 채집해 뿌렸다. 열매까지 달린 것을 보면 복원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상나무 구과(열매)가 자주색, 검은색, 초록색 등 갖가지 색을 띠고 있다. 허호준 기자
윗세오름 주변에는 분홍색 산철쭉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해발 1800m 장구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상나무숲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주변에는 노란색 섬매발톱과 산개버찌나무들도 보였다.
1930년대 한라산에 올랐던 시인 정지용이 시 <백록담>에서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고 말한 것처럼 한라산 조릿대의 키는 점점 작아졌다.
고정군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과장이 2000년대 초 심어 복원에 성공한 구상나무림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기자는 1979년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장구목을 거쳐 한라산 서북벽으로 정상에 오른 지 43년 만에 장구목을 찾았다. 김 연구사가 “등산객의 발길이 통제되고 조릿대를 베어내 원형의 한라산 산철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조릿대를 베어낸 곳에 이슬을 머금은 원색의 산철쭉이 안개가 끼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백록담과 어우러져 신비스럽게 보였다. 김 연구사는 “국내 아고산지대가 이렇게 넓은 곳이 없다. 토양 수분과 강수량 등을 측정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갖춰 시험 사이트로서는 최고의 장소”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1~5년 단계별로 조릿대를 베어낸 곳에 구상나무 종자를 뿌려 생육 조건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4월 1곳당 종자 200개씩 15곳에 뿌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조릿대 사이에 돋아난 싹이 보였다. 김 연구사는 “조릿대를 1년만 베어낸 곳은 조릿대가 거의 다시 자랐고, 5년 연속 1년에 한차례씩 베어내고 부엽토까지 긁어낸 곳은 과거의 장구목 모습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이 지난 4월 한라산 장구목에 뿌린 구상나무 씨앗에서 발아한 싹을 가리키고 있다. 허호준 기자
이날 참가한 연구자들은 “조릿대는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조릿대가 있었고, 조릿대가 한라산에 폭우가 내릴 때 침식을 방지하는 순기능도 있다. 최대한 활용하면서 줄여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김 연구사는 고산 침엽수 보호를 위해 ‘주의’(자생지 모니터링 강화), ‘경고’(자생지 모니터링 개소 확대 및 전수조사), ‘위험’(자생지 종자 확보), ‘심각’(자생지 외 보존원 조성) 등의 단계별 대응방안을 국가 연구기관이 공동 운용할 것을 제안했다. 한라산은 기후변화 대응에 따른 식생 보존을 위한 전략 기지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운영위원장은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는 지역은 섬이다. 한라산은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고 해안부터 고산지대까지 있어 좁은 지역에서 다양한 기후변화와 관련한 연구를 하는 데 최적지”라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