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19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이 유전자 채취를 위해 4살 추정 무명열사 묘를 개장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무명열사 묘 5기(묘역번호 4-90, 92, 93, 96, 97)와 행방불명자 묘역(10묘역)입니다. 고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일, 가족 이름 등이 묘비에 적힌 여느 희생자 묘와 달리 무명열사 묘비에는 ‘무명열사의 묘’ 다섯 글자와 이장 날짜만 덩그러니 적혀 있습니다. 행방불명자 묘는 봉분이 없어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대체 무명열사는 누구이고 어떻게 죽었길래 가족을 찾지 못한 것일까?’ ‘행방불명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음속 궁금증이 언젠가는 해소되기를 하는 마음에 무명열사 묘와 행불자 묘역을 찾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5·18민주화운동 등 주로 광주지역 소식을 취재하는 전국부 김용희입니다. 최근 광주에서는 5·18묘지에 묻힌 어린이 무명열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41년 동안 외롭게 누워 있는 어린 주검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4-97번 무명열사 묘에는 가족을 찾지 못한 4살(5·18민주화운동 당시·추정) 아이가 잠들어 있습니다. 묘역 끝부분에 있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묘지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는 1980년 6월7일 광주시 남구 송암동 야산에서 여자 옷에 싸여 암매장된 채 발견됐습니다. 아이 품속에는 1000원짜리 지폐 한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 공무원 조성갑(78)씨가 주민 제보를 받고 수습해 망월동 묘지(5·18 옛 묘역)에 안장했습니다. 같은 날 조선대병원의 검시기록을 보면 아이는 목에 총을 맞아 죽었고, 숨진 시기는 검시일로부터 10∼15일 전(1980년 5월23∼28일)이었습니다. 검시기록엔 ‘사망자를 30대 여성이 군 짚차(지프)에 싣고 와서 효덕동 소재 인성고등학교 앞산에 매장하고 그 차로 갔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의 죽음에 군이 연관됐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가 1980년 5월27일 아침 네살가량 된 남자아이를 안고 군 버스에 앉아 있다. 이동춘 교수 제공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붙잡힌 이동춘(62) 목포과학대 교수는 “마지막 항쟁 때 본인이 데리고 있던 아이가 어린이 무명열사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겨레>에 건넸습니다. 그동안 증거가 없어 말하지 못했는데
1980년 5월27일 아침 외신기자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에서 자신이 아이를 안고 군용 버스에 타고 있는 모습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영상 속 아이는 빨간색 상의를 입은 채 불안한 듯 창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최근 옛 전남도청에서 진행되고 있는 ‘외신기자 노먼 소프 5·18 특별 사진전’(5월7일∼7월31일)에 걸린 사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교수는 “진압작전 때 계엄군에게 붙잡혀 도청 앞마당으로 끌려갔는데 먼저 와 있던 남녀 고등학생 2명한테서 네다섯살 정도 남자아이를 건네받았다. 버스를 타고 상무대(전남·전북 계엄군 지휘본부) 영창으로 끌려가 분류심사를 받으면서 헌병에게 아이를 인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교수는 또 “친동생이 5·18 때 상무대 헌병이었던 지인한테 ‘그때 시민군이 안고 왔던 아이를 기억한다. 군 막사에서 보호하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군에 비상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한겨레> 보도 이후 어린이 무명열사에 대한 제보도 있었습니다. 한 50대 시민은 문화체육관광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에 연락해 “보도된 사진 속의 아이가 1980년 5·18 때 빨간 상의를 입고 나간 남동생과 얼굴이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민은 “당시 동생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몸집이 작아 네다섯살로 보였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복원추진단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와 협의해 유전자 일치 여부를 확인할 계획입니다.
4살 무명열사의 검시기록. <한겨레> 자료사진
5·18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에 근무했던 조성갑씨가 광주시 남구 효덕초등학교 건너편에서 4살 아이의 주검을 수습했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조사위에서는 어린이 무명열사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을 냈습니다. 어린이를 죽여 땅에 묻었다는 군인의 진술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5·18 때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62대대 소속 부대원 3명은 “1980년 5월24일 송암동에서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사격을 벌인 후 시민군을 찾기 위한 민가 수색과정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곳을 향해 총을 쐈다. 현장에 가보니 4∼5살가량의 아이가 사망해 가매장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조사위는 조성갑씨가 수습한 어린이 무명열사가 이때 숨진 아이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30대 여성이 매장했다’는 검시기록과 62대대 부대원 진술이 맞지 않아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시민 조아무개씨는 “5월27일 군용 버스를 타고 끌려갔는데 7살 아이와 함께 3일 뒤 풀려났다”고 조사위에 제보했습니다. 이 교수가 데리고 있던 아이가 27일 이후에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 교수와 함께 있던 아이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어린이 무명열사의 신원도 안갯속입니다. 확실한 건 ‘그때의 군인’들은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