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서민의 춘추멍멍시대
상대방의 외모를 보고, 학벌과 능력을 평가하고 자산을 따지는 사람과 달리 개는 계산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버는지, 내 외모가 어떤지, 차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예뻐해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연다. 모든 것을 준다
상대방의 외모를 보고, 학벌과 능력을 평가하고 자산을 따지는 사람과 달리 개는 계산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버는지, 내 외모가 어떤지, 차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예뻐해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연다. 모든 것을 준다
우리 개들은 내 외모를 탓하지 않으며,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버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개는 처음 만난 견주가 자신을 예뻐해 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연다. 게티이미지뱅크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개는 왜 그럴까 근본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 개들을 면밀히 관찰하던 중 다음 장면을 목격했다. 며칠 전 개들을 데리고 애견 놀이터에 갔는데, 거기엔 뒷다리가 하나 없는 개가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절단한 모양이다. 사람은 다리 하나가 없으면 걷지 못하지만, 개는 나머지 세 다리가 있어서 잘 걸을 수 있고, 그 개 역시 그랬다. 가슴이 찡했던 건 우리집 개들이 그 개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개들은 그 개와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다리 하나가 있고 없고는 그들 사이에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를 좋아하고 또 키우는 것은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맑은 영혼을 만날 수 있어서다. 게티이미지뱅크
개는 ‘계산’하지 않는다 비단 장애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를 본다. 예컨대 내가 소개팅을 나갔다고 해보자. 상대방은 하위 10% 안에 너끈히 들만한 내 외모에 놀란다. 내가 기생충학이라는, 좀 더러워 보이는 생물체를 연구한다는 것까지 알고 나면, 나랑 더 같이 있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강남에 건물을 몇 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바쁜 일이 생겼다며 일어나려던 상대방은 다시금 자리에 앉는다. “생각해보니 꼭 지금 갈 필요는 없네요. 하하.” 이 경우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다 해도 정나미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밖으로 표출하지 않아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은 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하다못해 친구 하나를 사귀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다. 이 친구가 나에게 득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옛날에는, 적어도 어린이들은 이런 계산에서 자유로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신과 잘 맞는지, 사람은 좋은지가 아니라, 임대아파트에 사느냐, 부모님이 뭐 하느냐, 차는 뭐냐, 이런 것들이 친구를 사귈지 말지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내가 아는 한 학부모는 자기 애가 대학에 갔을 때, “과학고 출신을 주로 사귀어라”는 황당한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개는 처음 만난 견주가 자신을 예뻐해 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연다. 재산이 많은지, 장애가 있는지 따위는 전혀 개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날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영혼 모든 것을 다 잃은 견주라 해도, 개는 그 견주와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부실한 식사밖에 얻어먹지 못할지라도 그 개는 안다. 그게 견주가 지금 해줄 수 있는 최선이며, 그것밖에 해주지 못하는 것을 견주 또한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그래서 개는 예전과 다름없이 견주를 대하고, 견주는 그 개를 통해 삶을 지속할 힘을 얻는다. 개를 좋아하고 또 키우는 것은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맑은 영혼을 만날 수 있어서다. 내게는 이런 개들이 여섯 마리나 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19가 그저 야속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으니, 약간의 위로는 된다. 우리 개들아, 늘 고마워. 너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도 많이 사랑할게. 단국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