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단국대 교수 집에는 인간과 동물 등 여덟 생명체가 삽니다. 이들이 엮는 좌충우돌 개가족의 이야기를 ‘애니멀피플’ 누리집과 ‘한겨레’ 지면에서 번갈아 격주로 전합니다.
50일 된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털 색깔이 은색이라 ‘은곰’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내와 나 모두 개를 좋아하는데, 성격도 활달하고 외모도 출중한 녀석이 왔으니 꽃길만 걸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우리 집에는 한 살 반짜리부터 다섯 살까지 연령대가 다른 개 다섯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같이 태어난 형제자매들 사이에선 우량아로 통했고, 덕분에 일진 노릇도 제법 했던 ‘은곰’이지만, 다 자란 성견들에 비하면 그저 꼬마일 뿐이다.
한 방송사 프로그램 이름처럼 세상에 나쁜 개가 없다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펼쳐졌으리라. 먼저 있던 개들이 막내로 들어온 은곰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피고, 그중 누군가가 은곰에게 행패라도 부릴라치면 다른 개들이 그 앞을 막아서서 은곰을 지켜준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만,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흑곰 “어릴 적 당한 게 분하다”
은곰을 처음 데려온 날, 개들의 표정은 시샘으로 가득했다. 은곰을 반갑게 맞아주기는커녕, ‘으르렁’거리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 일쑤였다. 같이 태어난 형제자매를 한꺼번에 입양한다면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자리를 먼저 잡은 개들이 있는 판에 또 다른 개가 들어오면 ‘텃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먹을 거야 조금 더 준비하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주인의 애정이다. 예쁨받기를 좋아하는 개들 입장에서 새로운 개의 등장은 그만큼 예쁨받을 기회가 줄어든다는 얘기니 말이다.
막내 은곰은 서민네 집에 들어오자마자 텃세를 감당해야 했다.
서민네 개가족의 첫째 팬더. 형제들간의 괴롭힘을 수수방관했고, 심지어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첫째와 둘째―이름이 팬더와 미니미다―는 비슷한 시기에 입양됐으니 별일이 없었지만, 그 이후 새로운 개가 올 때마다 텃세가 성행했다. ‘흑곰’이란 이름의 검정개가 들어왔을 때 특히 분개한 것은 미니미였다. 당시 미니미가 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던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래지 않아 미니미의 만행이 시작됐다. 우리가 안 보는 틈을 이용해 미니미는 수시로 흑곰을 괴롭혔다. 그때마다 흑곰은 짧은 다리로 도망 다니기 바빴는데, 첫째인 팬더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했고, 심지어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어릴 적 당한 게 분했는지 흑곰은 덩치가 미니미와 비슷해진 뒤부터 틈만 나면 미니미를 공격했다. 둘 사이의 싸움이 너무 격렬하다 보니 다치는 경우도 생기는데, 한번은 미니미가 눈을 다치는 바람에 적잖은 병원비를 들여야 했다. 안 되겠다 싶어 아내와 나는 싸움이 있을 때마다 말리려고 하는데, 둘을 떼어놓는 과정에서 미처 흥분이 가시지 않은 개들에게 몸 여기저기를 물리곤 한다. 병원 응급실에 가서 파상풍 주사와 더불어 손가락을 몇 바늘 꿰맨 적도 있고, 다리엔 물려서 생긴 흉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번은 아내가 얼굴을 물린 적이 있는데, 다들 내가 할퀴었다고 지레짐작을 해 아내와 나 모두 억울했다. 흑곰과 미니미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며 우리 집의 가장 큰 우환이 되고 있다.
흑곰이 들어왔을 때 분개했던 미니미. 나중에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
나중에 커서 흑곰(뒤)에게 보복당하는 미니미(앞).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런 일은 넷째, 다섯째를 데려올 때도 벌어졌다. 자신도 어릴 때 설움을 겪은 이들이 은곰이에게 텃세를 부리는 건, 도대체 개들이 뭐가 착하다는 것이냐는 의문을 던진다. 그래서 아내는 가끔 탄식하곤 한다.
“내가 개들 교육을 잘못 시켰어.”
얼마 전에도 은곰은 첫째(팬더)로부터 이유 없이 공격을 받아야 했다.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주인의 애정을 받으려는 모습이 팬더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한데, 애가 어찌나 놀랐는지 구슬픈 비명과 함께 똥을 싸버리기까지 했다. 물론 시간이 감에 따라 조금씩은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어제도 저녁 식사를 하는 와중에 은곰은 식탐이 강한 넷째 황곰이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했다. 은곰은 엄연히 자기 밥그릇의 밥을 먹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 흑곰이 미니미에게 하는 것처럼, 은곰이가 크면 지금 당했던 것에 대해 보복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다. 그러니까 개가 착해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 주인에게 충성하기 때문이지, 자기네들끼리 있으면 개들은 이기심 덩어리일 뿐이다.
개싸움, 서민네 집의 우환이 되다
‘아이는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아주 어릴 적 아이들은 우리 집 강아지들처럼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막 태어난 동생이 모유를 먹는 걸 첫째가 방해하고,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 말썽을 부리는 애들의 존재는 바로 그 증거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남을 배려하는 어른이 되는 건 ‘사회화’ 교육을 받은 결과지, 원래 착했던 것은 아니란 얘기다.
사람과 달리 개들은 사회화 교육이 불가능하니, 이들이 장차 다른 개를 배려하는 성견이 되기는 글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뭐 어쩌겠는가. 그냥 예뻐하는 수밖에. 이기적이든 뭐든, 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옆으로 누워 잠을 자는 모습은 마치 천사 같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정도 예쁘면, 나만 예뻐해 달라고 패악을 부려도 이해해야 되는 게 아닐까?”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다. 제대로 효도한 적도 없고, 개만큼 예쁘지도 않지만, 어머니가 날 한결같이 사랑해주신 이유도 어머니 눈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뻤기 때문이겠지. 개를 기르면 어머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글·사진 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