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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월곡교회 정진우 목사(현 기독교장로회 선교국장)

등록 2005-10-28 20:37

우리 목사님 설교대는 쌀 뒤주래요

미아리텍사스촌 월곡교회 정진우목사

자칫 그냥 지나칠 뻔했다. 뒷골목을 돌고 돌았지만 큰 건물도, 높게 솟은 십자가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작은 티코 자동차조차 지나다닐 수 없이 더욱 좁아진 골목 속에서 월곡교회는 허름한 이웃집들과 마치 어깨동무하듯이 그렇게 숨어 있었다.

교회 마당에 놓인 낡은 의자 위에서 아이들이 지절댄다. 매매춘 지역인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 뒷골목의 그늘이 이 아이들의 얼굴에선 눈에 띄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봄날의 햇살처럼 밝고 유쾌하기만 하다.

정진우 목사는 이 아이들의 벗이다. 1989년 여름 이 교회에 부임한 첫날 새벽 그는 동네를 돌러 나갔다가 매춘여성들에게 붙들렸다. 몸부림 끝에 그 자리를 피한 그는 홍등가의 영업이 없는 낮에 다시 들렀다. 그때 가게 뒷집의 댓돌 위엔 아이들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도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92년 2월부터 드디어 교회 안에 월곡공부방을 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맞벌이라서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식사도 제공했다.

현재 공부방엔 낮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어린이부에 30명,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운영하는 중학생부에 10명이 나온다. 강기원 전도사와 대학생 자원봉사자 10명 등이 이들에게 직접 공부도 가르치고 돌본다. 이들은 이곳에서 집단상담치료도 받고, 연극도 하고, 1년에 네차례씩 캠프도 가면서 점점 명랑한 모습을 되찾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민수는 이곳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날이 밝아졌다.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민수는 최근 공부방 중학생부 졸업식에서 "이제 공부방 동생들을 내가 잘 돌볼 테니 선생님들 걱정 말라"고 말해 선생님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공부방 학생 1명당 형편에 따라 한달에 1만~3만원씩을 받지만 이마저 못내는 아이들이 태반이고 1년 운영비 3천만원의 10분의 1밖에 걷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운영비는 성금이나 신자들로 구성된 '공부방 운영위원회'에서 충당한다.

그렇다고 이 교회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신자래야 고작 40여명. 그러나 이들이 하는 일은 일당백이다. 주일날 교회에서 함께 식사한 뒤 성경공부를 하고, 꼬박 한달에 한차례씩은 성지순례를 다니며 역사적 인식을 가다듬는 충실한 개신교인이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이들은 '한셈치고 운동'을 벌여 택시탄 셈치고, 커피 마신 셈치고, 돈을 모아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고 있다. 또 어려운 양심수를 골라 지원하기도 하고, 부활절 앞 고난주일에는 장기수 할아버지와 민가협 어머니들을 초대해 식사도 함께하며 기도한다.

이 교회는 80평에 불과하지만 800평의 교회보다 더 크게 쓰이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유은필 목사가 1955년 개척한 이 교회에는 김재준, 함석헌 목사 등도 현재 공부방이 들어선 방에 자주 모여 민주화의 길을 논의하곤 했다. 89년엔 갈곳없는 전국교직원노조 회원들의 단골 모임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정 목사도 96년부터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총무를 맡아 이웃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선배 목자들의 삶의 자세를 따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실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3년 전부터 성북복지연대 대표로 성공회 푸드뱅크의 지원을 받아 끼니를 잇기 어려운 노인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고 있다.

어느 때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있는 정 목사. 그가 설교하는 강대상은 쌀 뒤주였다. 교회와 밥이 하나이고, 그의 배움과 실천이 하나임을 보여주듯이. (02)914-4302. 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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