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터가 심은 생명의 사과나무
돈 받고 파는 교권의 면죄부 맞서 ‘예수뜻 회복’
화형으로도 태우지 못한 ‘성서 진리’ 깊은 뿌리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500돌(2017년)이 6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교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려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얼굴로 꼽히는 대형교회들로부터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와 싸움,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돈선거’ 등으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거세지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때마침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담임·소강석 목사)의 ‘종교 개혁지 순례’에 함께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를 시작으로 4회에 걸쳐 개혁가들의 삶을 되살려 본다.
인구는 6천 명이었지만, 재판정엔 1만여 명 모여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그대 성서학 교수였던 루터가 독일황제의 소환을 받고 보름스에 도착해 제국회의장에 선 것은 1521년 4월 17일이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붙인 비텐베르그에서 보름스까지 700여km. 한 달은 걸어야 할 거리다.
왜 그는 험난한 길을 자처했을까. 비텐베르그성교회를 찾는 연간 20만 명의 순례객들에게 루터의 사상을 전하는 벤 하르트 구룰(75) 가이드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린 것, 그것이 핵심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돈을 주고 산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깨달은 루터는 면죄부를 판 교권에 맞서 ‘성서의 진리’를 전하려 했다. 그곳에 갔다가 체코의 얀 후스(1372~1415)처럼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길을 나섰다.
“얀 휴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지붕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있더라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독일 내 ‘3대 바로크양식건물’이라는 보름스대성당은 ‘죄많은 인간’을 초라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과 권위를 갖췄다. 500년 전 보름스 인구는 6천 명이었지만, ‘루터의 재판정’엔 무려 1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심약하기만 했던 루터가 대성당의 황제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었을까.
성당 입구 계단엔 예닐곱 명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연히도 면죄부 판매의 선봉장으로 루터를 격발하게 했던 수도사 요한 테첼이 소속됐던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사들이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테첼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자에서 돈 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난다”며 면죄부를 팔았던 인물이다. 500년 전 가톨릭의 부패상을 상징했던 테첼의 후예들에게선 오히려 그런 악취는 풍기지 않는다. 이국의 순례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필립 수사의 해맑은 웃음 어디에도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이곳 보름스회의장에서 목숨을 건 루터의 이런 외침이 없었다면 분열의 아픔을 만회할만한 정결함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스피노자보다 100년 앞서 그의 일기장에 적혀 있어
“내 양심이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나는 내 발언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취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길. 아멘.”
면죄부를 팔아 모은 돈이 흥청망청 대는 로마 교황청과 새로 지은 성베드로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사제로서 삶이 몰수당하는 파문을 당했음에도 루터는 개혁을 향한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끊임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의 용기와 정의를 북돋워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의지의 인간이었고, 일평생 자신의 죄를 고백한 회개의 인간이었다.
우리가 스피노자(1632~1677)의 말로 알려진 이 말이 실은 그보다 100년도 전에 마르틴 루터의 청소년기 일기장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음악가 바흐(1685~1750)의 고향이자 루터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 앞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네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보름스(독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종교개혁 가능하게 한 외부요인들
프리드리히 제후가 납치한 척 데려와 보호
인쇄술과 인문학적 지성도 개혁에 힘 보태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보였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라는 탁월한 인물 외에도 여려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루터의 고향, 독일의 권력가들이 루터 편이었다는 점이다. 독일 인근의 350개 공국이 모인 독일제국은 로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의 신성로마제국(962~1806년)으로 불렸지만 로마 교황의 전제에 반항하는 민족주의가 싹터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7개의 주요 공국의 제후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했는데, 합스부르그왕가(훗날 오스트리아)와 함께 쌍벽을 이룬 작센공국의 프리드리히 제후가 후견인이었다. 독일 황제 카를5세가 로마 교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보름스로 소환해 해명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루터의 뒤에 프리드리히 제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황과 황제로부터 이중파문을 당한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프리드리히 제후는 4명의 기사를 보내 ‘납치’를 가장해 데려와 바르트부르그성에 숨겨줄 정도로 적극적인 보호자였다. 루터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까지 규정하며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인쇄술이 꼽힌다. 루터가 비텐베르그성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놓았을 당시만 해도 거의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던 한 사제를 유럽의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것은 인쇄된 그의 책자들이었다. 인쇄소를 하는 친구를 두었던 루터는 인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선전가이기도했다. 에르푸르트대학에서 처음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루터는 훗날 에라스무스와 결별하긴 했지만 인문학적 지성도 그의 개혁에 힘이 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구교(가톨릭)의 부패와 개혁 사제의 등장과 함께 이런 정치·사회·산업적 요인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조현 기자
◇ 숨은 공로자 아내 폰 포라
수녀원 탈출해 루터집 숨어든 10명 중 한 명
한밤 중 소복 소동으로 용기 잃은 남편 채근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살았던 비텐베르그의 루터하우스엔 루터와 나란히 한 여인의 그림이 걸려있다. 루터가 교황과 맞서 싸울 때 루터에 동조한 나머지 수녀원을 탈출해 루터의 집에 숨어든 10명의 수녀들 중 한 명이다. 그가 바로 루터의 부인 캐서린 폰 보라다. 1525년 루터가 42세 때, 그가 26세 때다. 사제 출신과 수녀 출신의 결혼은 종교적인 문제와 개인의 사생활이 분리되고, 독신 수도자 제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극소수의 친구 중 한 명인 루카스가 그린 그의 그림은 경건하면서도 후덕한 인상이다. 루터와 폰 보라는 3남3녀를 낳았다. 그 가운데 둘이 사망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프랑스와 보헤미아를 주어도 폰보라와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폰보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심약했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던 루터가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는데 폰 보라의 역할은 지대했다. 폰 보라는 늘 제자들이 들끓으며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남편을 안정적으로 돌봤을 뿐 아니라 루터가 교황의 파문으로 사제로서 살아온 삶을 몰수 당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를 구원해 종교개혁을 이루게 한 숨은 공로자였다.
결혼 전 폰보라는 어느날 한밤 중 소복을 입은 채 루터의 방에 들어선다. 그러자 깜짝 놀란 루터가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폰 포라는 “하느님이 죽었다”면서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이토록 용기를 잃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힘을 얻어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한 전진을 다시 시작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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