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의 원류를 찾아
1. 아픔과 상처가 해탈의 씨앗이다 2. 우상과 독선의 안경을 벗고 실상을 보라 3. 네 생긴 그대로가 바로 부처다 4. 집착을 벗어라.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다
▶5.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라
5.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라
“네가 바로 부처인데 뭘 남에게 묻느냐”
무엇을 저리도 간절히 구하는 것일까. 순례단의 아쉬움을 담은 마지막 방문지인 광저우시 광효사 일주문 밖 광장에 이르니 한 탁발승이 간절한 모습으로 절을 하고 있다.
1300여년 전이었다. 이곳에서 인종법사의 법회가 열리고 있는데, 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며 소리를 냈다. 이를 본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스님이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다툼이 계속되자 이를 지켜보던 방문자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동시에 모두가 발언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스님들은 “그럼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조계종에 큰 영향 미친 임제선사도, 운문선사도 후학들 혼비백산케 한 가르침의 참뜻은 앵무새가 아닌 주체적인 깨침 바란 것
“두 스님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23살 행자의 몸으로 오조사에서 홍인의 법통을 받은 뒤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혜능이 마흔이 되어 세상에 다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혜능은 이곳에서야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된다.
대웅전을 돌아가니 혜능이 삭발한 머리를 보관해둔 예발탑이 서 있다. 후학들이 외부의 경계에 다시 마음이 희롱당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인가. 예발탑 옆에서 바람이 일더니 풍경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고, 깃발이 더욱 흔들린다.
순례단은 이미 조계종에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임제 선사(?~866)를 만나지 않았던가. 베이징을 출발해 처음 들른 스자좡의 백림사에 가자 거대한 임제의 열반탑이 소리 없는 ‘할’(고함)을 하고 있었다. 덕산의 방(방망이)과 함께 임제의 할은 당대 후학들을 깨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호랑이굴에 고양이는 살 수 없다고 했던가. 그의 고함에 대부분의 선승들은 혼비백산해버렸다. 그러나 임제의 할은 후학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자 함이었다. 그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머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지금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 세계다)은 선승들에게 목숨과도 같은 지표가 되었다.
그런 임제가 열반하던 날이었다.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내 법을 잊지 말라고 하자 한 제자가 늘 임제가 했듯이 “할!”을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임제는 “저 눈먼 당나귀에 의해 내 법이 끊길 줄 누가 알았으리요”라고 한탄했다. 왜 그랬을까. 임제는 ‘제2의 임제’를 원치 않았다. 앵무새를 경멸했다. 그는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주인으로 서는 사자를 원했다. 벼랑에서 밀어도 다시 올라오는 그런 사자를.
순례단이 임제의 그 간절한 바람을 잃어버릴 즈음이었다. 순례단은 사조사의 도신 대사 토굴터에서 모처럼 시간을 내 함께 참선했다. 참선 뒤 고우 스님은 자신의 방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우리나라 근대의 고승 백학명 선사(1867~1929)의 시를 들려주었다. 백학명 선사는 달마를 빗대 ‘손님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주인만 번거롭게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했단다. 부처나 조사라도 나를 노예로 만든다면 죽여야 한다고 했던 임제의 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순례단이 이어 찾은 광저우 인근 운문사의 운문 선사도 이에 못지않았다. 누군가 선(禪)을 묻자 “맞서는 것”이라고 했다. 고우 스님이 운문의 등신불 앞에서 운문의 견성담을 들려준다. 운문은 임제의 법형제인 목주 선사에게서 깨쳤다. 목주는 본래면목을 물으러 오는 이를 미친놈이라는 듯 한 번 쳐다보고는 문을 꽝 닫아버리곤 했다. 며칠을 문전박대 당한 운문이 하루는 목주가 문을 닫기 전에 발을 문틈에 쏙 밀어넣었다. 그런데도 목주는 문을 꽝 닫아버리는 바람에 운문의 다리가 댕강 부러져 버렸다. “으악” 하면서 망념이 사라진 순간 목주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네가 바로 부처인데, 뭘 남에게 묻느냐 이 미친놈아!”라는 목주의 말뜻이 제대로 보여 본래면목이 밝아지지 않는가.
등신불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운문의 말인 ‘함개건곤 일일시호일’(函蓋乾坤日日是好日·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으니 매일매일이 다 좋은 날)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운문은 시비와 소란을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누가, 어떤 환경이, 어떤 조건이 ‘주인공’ 운문을 노예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운문사를 나서니 날은 어둡고 날씨는 흐려지고, 다시 갈 길은 멀다. 그래도 날마다 좋은 날이다. 스자좡 광저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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