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옆 초가교회 짓고 옆집 아저씨되어 사랑전파
충남 금산군 금성에 가는 대둔산 자락은 꽃과 개나리, 진달래로 길마다 꽃잔치다. 교회를 찾아 떠나지만 온 산과 들이 그대로 천당이고, 예배당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이 춤추는 이 축복의 땅을 어떻게 경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른 들판 바라보는 시골 마을 한 켠에 초가집 한 채. 밧들교회다.
초가교회 옆에 너와지붕을 엮고 있는 한 농부에게서 흙 향기가 느껴진다. 김명준 목사(40)다.
해가 잘 드는 밭과 들이란 뜻의 양지밭들인 이 마을은 김 목사의 고향이다. 교회 이름은 마을 이름의 발음과 ‘섬김’의 뜻을 가미한 것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색칠하지 않은 나무와 흙들이 자연 그대로 숨쉬고 있다.
여름밤이면 도시의 아이들이 김 목사와 함께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별님과 달님 이야기로 날을 지새고, 낮이면 야생초와 민물고기를 벗삼아 노는 생명학교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익명자 1천만원 헌금 종잣돈
흙벽돌 찍고 나무 깎아
자연이 숨쉬는 교회 세워
방과후 아이들 공부방 개방
농촌의 소중한 몸으로 느끼게
평소엔 마을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방이다. 요즘 시골 아이들의 상당수는 인터넷과 휴대폰,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마음은 늘 도시에 있다. 그래서 김 목사는 시골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한 망각에서 깨어나도록 방과후학교를 시작했다.
김 목사 자신도 고등학교 재학 때까지 고향에 머물렀지만 시골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농촌목회를 준비할 때만 해도 농촌은 그의 눈에 버려진 땅이었고,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는 귀향을 준비하던 중 농촌 목회의 선배들인 조화순, 박흥교 목사 등을 만나고 시골을 다니면서 비로소 시골이야말로 하나님이 숨쉬는 축복의 땅임을 실감하게 됐다. 그는 1995년 비로소 농촌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귀향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 집과 땅들을 정리하고 부모님도 함께 상경했기에 고향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래서 고향의 자연 그대로가 그의 것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방 한 칸 부엌 한 칸짜리 시골집을 빌렸다. 그러나 초보 농사꾼에게 누구도 땅을 빌려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카시아 나무가 칡덩쿨처럼 뿌리내린 묵정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가 남몰래 흘린 비지땀들이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 집 두 집 땅을 빌려주고, 할머니들이 모여 그와 이웃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논 4천평과 밭 1천평을 가꾸는 농사꾼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몇해전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란에 ‘목사’라고 쓰지 않고, ‘농부’라고 썼다고 해서 눈물 겨웠다는 그다. 딸이 농부라는 직업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이 드디어 딸에게도 농부로 대접받았다는 것에 감격한 것이다. 1998년엔 한 익명자가 시골 교회를 위해 헌금한 1천만원을 종잣돈 삼아 그와 교인들,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흙벽돌을 찍고, 나무를 깎아 이렇게 아름다운 초가 교회를 세웠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목사들처럼 깔끔한 양복을 빼입고 위엄을 갖추려하지 않는 아들 목사에게 불만이 적지 않지만 그는 오늘도 목사보다는 이웃집 아저씨가 되고 만다. 옆집 할머니가 “우리 집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며 금세 또 그를 부르러 왔다.
금산/글·사진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