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 함께 뒹굴며 사랑 실천하는 ‘노숙인’ 목사
애빈교회 김홍술 목사
살아가면서 아주 가끔씩 소설의 주인공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부산의 걸물’ 김홍술 목사(49)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를 찾아 간 곳은 부산진역 인근 수정시장 안 지하에 있는 ‘부산홈리스 사회복지관’이었다. 노숙인 150여명이 매주 화·목·토요일 아침을 해결하는 곳이다. 식당은 널찍하지만 그의 사무실은 2~3명이 겨우 앉을 정도로 좁다. 이마에 안경을 걸쳐 놓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이 벌써 목사란 이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6살 소년으로 처음 예수를 접한 그의 삶은 애초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신학대학에 진학했으나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신학교의 모습에 실망하고 말았다. 어느 날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읽고선 프란체스코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옷을 벗어놓고 거의 나체상태로 2년 넘게 걸식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생각과 다른 신학교에 실망…2년간 걸식·노동판 전전
희망 노래하는 노목사에 감명…노숙인 공동체 교회 세워
1978년 1월엔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5개월 뒤 탈영했다. “동포를 주적으로 삼을 수 없다”던 그는 꼬박 3년 간 영창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서울 삼각산에 들어가 걸인, 알코올중독자들과 천막에서 1년을 보냈다.
86년 결혼한 뒤 먹고 살기 위해 노동판을 전전하던 그는 허름한 예배당에서 청년들과 감자 한 알을 나누며 희망을 노래하던 노목사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격정적 삶을 되돌아봤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촛불 하나 조용히 밝히고, 사막을 탓하기 보다는 묘목 하나 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신학교에 편입해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89년 건물 지하에 예배당을 열었다. 24시간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노숙인들이 먹다 남은 라면과 소주병이 뒹구는 예배당이었다. 노숙인들과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 목사는 ‘형제들’과 함께 급식이 끝난 학교를 돌아다니며 남은 음식을 수거해왔다. 국은 데우고, 반찬은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다음날 아침 노숙인들에 줄 음식들이었다.
김 목사와 ‘형제들’이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북구 구포2동 ‘부활의 집’ 겸 애빈교회였다. 92년에 설립한 노숙인공동체다. 산골 마을 같이 한적한 한옥집에서 김 목사는 ‘형제’로 부르는 11명의 노숙인들과 함께 산다. 중학교 교사를 하는 아내와 두 아이가 사는 집은 1주일에 한 번만 갈 뿐이다.
어찌 보면 김 목사도 집 나온 노숙인인지 모른다. 관의 지원을 아예 받지 않는 이곳엔 달리 고용인이 없다. 형제들이 모든 집안 일을 손수 해냈다. 그런데도 집은 깨끗하고 잘 정돈돼 있다. 김 목사와 형제들은 이곳에서 살며 거리의 노숙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학교에서 걷어온 반찬으로 차려진 저녁 밥상은 고급 식당의 메뉴에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정감이 더해졌다. ‘형제들’의 얼굴에 스민 기쁨과 평화도 이 때문일까. 그런데도 김 목사는 ‘형제들’보다 자기가 “더 행복하다”고 했다.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부산/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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