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현 선수 극단적 선택 이면엔 상습 폭언,구타 등 가혹행위 ‘일등주의’ 앞세운 기득권, 가해자들 고발해도 미온적 대응만
국가대표와 청소년대표로 뛴 고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최숙현 선수 유족 제공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다.” “체중 다 뺐는데 욕은 여전하다.” “차에 치이든 강도가 찌르든 정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2일 일부 공개된 고 최숙현(22) 선수의 훈련일지와 녹취록을 보면,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은 ‘지옥의 팀’이었다. 체중조절에 실패했다고 사흘 동안 굶게 하고, 신발과 손바닥으로 일상적으로 뺨을 때리고, 맞는 선수를 보면서 ‘찌개 끓이는’ 감독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최숙현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수백번씩 맴돌아, 내가 정신병자인 걸까…”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철인들이 한다는 트라이애슬론 청소년대표까지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부모한테는 카톡에 “우잉, 고마웡”이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전형적인 20대 청춘이었다.
미친 건 그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구타와 폭언으로 선수들을 몰아치는 경주시청 김아무개 감독은 승부욕이 강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았다. 팀을 운영하는 경주시청은 팀 관리감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국체전 우수종목인 트라이애슬론 팀에 전속 트레이너(팀 닥터)까지 붙여주었다. 이 팀 닥터는 선수단의 고참 선수와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최숙현을 구타했다.
1월 최숙현 등 3명이 경주시청 김 감독과 팀 닥터, 선수 등을 경찰에 고소했지만, 피고소인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최숙현을 고립시켰다.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쉽지 않았고, 동료들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외로움은 더 커졌다. 4월 대한철인3종협회와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호소했지만, 기민하지 못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먼저 분리하고 선수와 가족을 안심시켜야 했지만 성폭력 사건과 달리 그런 매뉴얼이 없었다. 선수의 고통을 모른체하며 ‘일등주의’ 성과로 연봉과 자리를 보전하는 모든 기득권 조직이 최숙현의 적이었다.
트라이애슬론은 종목 특성상 선수 개인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간다. 종목마다 거리 차이가 있지만, 올림픽 표준으로 채택된 방식을 보면 선수들은 수영(1.5㎞), 사이클(40㎞), 달리기(10㎞)를 수행해야 한다. 총 51.5㎞의 거리를 남자 선수들의 경우 1시간30분대, 여자 선수들은 1시간50분대에 주파한다. 이럴 경우 사이클은 평균속도 시속 48㎞를 넘나들고, 달리기 10㎞ 기록이 전문 육상 선수들과 비교해서 2~3분 차이밖에 나지 않을 정도다.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평상시에 엄격한 식이요법과 강도 높은 훈련을 지속하게 된다.
한 관계자는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 선수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스포츠다 보니 단합이라는 명목으로 훈육이 자주 행해진다. 특히 정상급의 선수는 기록 단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선수를 몰아붙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단 내에서 이른바 ‘군기’도 다른 종목에 비해서 세다는 의미다. 고인과 운동을 같이 했던 지인은 “선수단 안에서 감독 외에도 폭력이 있었다. 특히 선배 선수가 고인에게 폭언을 퍼붓고 자주 때렸다”고 증언했다.
이번 사건을 폭로한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폭행에 시달렸다는 추가 피해자들이 더 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달간 10일 이상 폭행을 당했다. 심지어 자살하도록 만들겠다는 폭언까지 한 것으로 돼 있다”고 공개했다.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에 관한 경위 보고를 받기 위해 2일 오후 서울 송파구 대한체육회를 찾았다. 경위 보고에 앞서 김승호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왼쪽)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일등주의가 바뀌지 않는 한 고질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대학생 운동선수 인권실태 조사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 4924명의 대학생 운동선수 가운데 31%인 1514명이 구타 등의 신체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지난해 1월 조재범 전 쇼트트랙 코치의 성폭력 사건이 나라를 뒤흔든 뒤 스포츠 혁신을 위한 제도개혁이 추진 중이지만 악습이 계속되고 있다.
성문정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박사는 “감독의 열정이라는 식으로 미화하면서 서로 눈감아주는 스포츠계의 온정주의로 잘못을 덮다 보니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인지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신고의무를 강제해야 한다”며 “대한체육회도 상급기관이라는 이유로 방관하지 말고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정국 김창금 이준희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