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씨가 뛰었던 한국방송(KBS) 강릉방송국 사회인 야구팀의 모습. 본인 제공
1982년,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잇단 프로스포츠 개막을 놓고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말도 있었지만, 나중에 어른이 돼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두근거림을 즐기면 될 뿐. 아무렴, 초등학생인데.
프로야구 출범 기념으로 옆 학교 아이들과 야구 한 판 붙기로 했다. 영광스럽게도 선발투수로 낙점된 터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몸을 풀었다. ‘이렇게 던지면 되겠지’ 하고 투구 동작을 하는 순간, 아뿔싸. 목에 벼락 맞은 느낌이 들더니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야구 할 생각에 무리해서 있는 힘껏 공 던지는 시늉을 하다가 목 근육이 순간 뭉쳐버린 것이다.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아빠의 등에 업혀 가까운 외과로 갔다. 주사를 맞은 뒤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하나를 또 배웠다. 지나친 기대와 흥분은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시간이 흘러 한국방송(KBS) 강릉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 취업에 모든 신경이 집중돼 있다가 직장인이 되면서 슬금슬금 ‘보는’ 야구가 아닌 ‘하는’ 야구가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지만, 일회용 렌즈를 장착한 터라 시력 걱정도 더는 없었다. 더욱이 사회인 야구팀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여서, 어느 날 야구를 좋아하는 한 피디(PD) 선배를 불러놓고 거사를 도모했더랬다.
“팀 한 번 만들어봅시다!”
그렇게 내 진짜 야구 인생이 시작됐다.
한국방송(KBS) 강릉방송국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던 시절의 이영재씨. 본인 제공
언제까지나 집 주변 공터나 학교 운동장 한쪽에서 나뭇가지로 파울라인을 대충 그려 넣고 경기할 줄 알았다. 그때의 꼬마 야구광들은 이제 배가 나오고 머릿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어릴 적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식 야구장에서, 자격이 있는 심판을 두고, 전광판에 올라와 있는 본인들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죽기 살기로 치고 달린다. 아무리 야구를 즐길 뿐이라고 해도, 서툰 동작과 실수에 배꼽을 잡을 일은 끊이질 않는다.
변명거리는 참 많다. 이젠 아무리 용을 써도 예전처럼 다리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분명 공을 보는 순간 번개처럼 휘두른 것 같은데 공이 지나가고 한참 뒤에야 배트가 돌아가곤 한다고. 그러면 어떠하랴. 허무하게 삼진을 먹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음 수비, 다음 타석만 생각해도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진다.
인생은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꼭 해야 하는 것을 미루면서도 별 느낌이 없던 시기와 그렇게 살아온 것을 많이 후회하는 시기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두부 자르듯 둘로 쪼갤 수 없긴 하겠다.
단언컨대, 야구로 한정하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해 후회하는 두 번째 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 없었다. 미루어 본 적 없이 사랑했고, 뛰어들었고, 퍼뜨렸다.
이영재씨의 아들이 약 7년 전 제주에서 리틀야구를 하던 모습. 아버지의 야구 사랑은 이제 스무살이 된 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본인 제공
그런데도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체력이 좋고 운동신경도 괜찮다는 사람들은 운 좋게 담장을 넘겨 본 경험이 있을 텐데, 그걸 한 번도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홈런은, 진정 담장을 ‘넘기는’ 제대로 된 홈런이다. 때린 공이 외야 한구석 숲 속으로 굴러가 빠른 발로 홈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이른바 ‘러닝 홈런’(인사이드더파크 홈런)이 아니다. 야구에 후회는 없지만 홈런에 대한 갈증은 해소할 방법이 보이지 않음을 어찌하랴.
바로 전 경기에서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는데도 일주일 후 열린 2차전에 꾸역꾸역 출전한다. 집에서는 엄살이요, 경기장에서는 투혼이다. 컨디션마저 좋지 않았는지 배트에 공이 좀체 맞질 않는다. 투수의 공이 워낙 빨라 또 삼진을 먹겠지 하며 잔뜩 위축된 내 모습이 보인다.
눈 한번 질끈 감고, ‘될 대로 돼라’ 주문을 걸어본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오는 순간 타이밍을 잡는다. 세 박자까지 가지 않고 ‘하나, 둘…’ 센 뒤 힘차게 배트를 돌린다. 손바닥에 느낌이 제대로 왔다. ‘풀스윙’ 후 하늘을 바라본다.
‘어…?’
공이 까마득히 외야석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공이 담장을 넘어가고 말았다. 팀 동료들의 환호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홈런이다! 내가 드디어 홈런타자가 된 것이다!
순간 귀가 먹먹해지며 시야가 점점 좁아짐을 느낀다. 앞이 캄캄하다.
얼굴은 또 왜 이리 간지러운 건지.
이런!
강아지가 핥고 있다.
이번에도 꿈이었다.
꿈이면 어떠랴. 야구가 계속되는 한 나의 꿈도 이어질 테니까.
이영재(강원 강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