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정씨가 지난 4월2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2 KBO리그 개막전 기아(KIA) 타이거즈와 엘지(LG) 트윈스의 경기에서 손팻말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유정 제공
고등학생 시절,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묻곤 했다. ‘너는 왜 야구 하는 아저씨들을 좋아하느냐’고. 하지만 내겐 그들이 아이돌보다 멋졌다. 다른 친구들이 교실 벽면에 각자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붙일 때, 나는 자랑스럽게 기아(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걸었다. 빨간 호랑이들이야말로, 내겐 누구보다 멋진 연예인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게 됐을까. 가장 큰 매력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경기 시간도, 득점 방법이나 규모까지.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항상 ‘오늘은 어떤 경기를 할까’ 새로운 마음으로 기대하게 된다. 투아웃에서도 생기는 ‘혹시나’하는 기대감과 그 기대가 현실이 되었을 때 오는 짜릿함은 계속 야구를 보게 한다.
최유정씨가 2017년 8월19일 학교 벽면에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걸어둔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본인 제공
야구는 규칙이 복잡한 스포츠로 유명하지만, 실은 그래서 계속 새로운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홈런 한 방으로 역전할 때 짜릿함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야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겠지만, 그만큼 도루나 번트 등 소소한 작전이 성공했을 때 재미도 만만치 않다. 첫인상은 무서워 보이는 선수들의 반전 모습처럼, 야구에도 반전 매력이 있다.
내 인생 첫 야구장 방문은 아마도 2009년 5월24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에스케이(SK) 와이번스의 경기였다. 아버지는 응원하는 팀도 아니면서, 딸에게 야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경기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라 응원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운명의 기아 타이거즈 경기를 처음 본 건 1주일 뒤인 5월31일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야구장을 갔지만, 그때는 야구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닌텐도 게임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와 함께 2009년 5월31일 기아 타이거즈 경기를 처음 관람한 최유정씨. 본인 제공
중학생이 된 뒤에는 바쁜 학원 스케줄 때문에 몇 년 동안 야구장에 가지 못했다. 체육 시간에 발야구를 할 때면 야구 규칙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등 일상 속에 야구가 가끔 등장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우연히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덕분에 다시 야구장을 다니게 됐다. 우리는 틈만 나면 야구장에 갔고, 서울에서 기아 경기를 볼 수 없는 날엔 두산 베어스 팬인 친구와 함께 두산 경기를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2017년 10월30일, 잊을 수 없는 기아 우승. 힘들게 표를 구해 외야 어딘가 어른들 사이에 묻혀 서너 시간을 까치발로 보느라 고되긴 했지만, 외야로 날아온 만루홈런과 양현종 선수가 마무리 투수로 나와 이뤄낸 우승의 순간을 기억하면, 힘들었던 과정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재밌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한국시리즈 다섯 경기 중에 어쩌다 딱 우승하던 5차전을 찾아갔을까. 정말이지, 기아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부모님께 ‘야자’(야간자율학습)한다고 거짓말하고 야구장에서 기아를 응원하던 고등학교 2학년생의 가을은 그렇게 영원히 내게 아로새겨졌다.
기아 타이거즈 이범호가 2017년 10월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7 KBO리그 한국시리즈 5차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3회 만루홈런을 날린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아가 우승한 다음 해, 나는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 ‘고3’이 됐다. 야구에 미친 내가 걱정되었던 친구들은 나를 위해 각서를 쓰게 했다. 2월에 ‘야구장에 가지 않겠다’는 식의 각서를 쓰고선 정말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기아가 그다지 잘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야구에 대한 관심을 줄일 수 있었다. 타이거즈를 사랑했던 나는 평생 호랑이와 함께할 운명인지,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빨간 호랑이’(고려대 상징은 호랑이다)와 계속 함께할 수 있게 됐다.
고3이 된 최유정씨를 위해 친구가 그려준 그림. 본인 제공
대학생이 된 뒤에는 더 열심히 야구를 보러 다녔다. 낮 경기에 유독 약했던 2021년 기아를 보러 광주에 가기도 했는데, 에스에스지(SSG) 추신수 선수의 만루홈런에 처참히 지는 광경을 보고 돌아왔다. 당시에는 거리두기로 인해 자리를 띄어 앉고, 육성응원을 못 해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리고 2022년, ‘진짜’ 야구가 다시 돌아왔다. 양현종 선수가 미국에서 복귀했고, 나성범 선수를 영입하면서 올해는 무언가 달라도 다를 거란 기대감을 안고 개막전을 보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지만, 그런데도 개막전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5월에는 잠실에서 2만4000여명의 엄청난 관중과 오랜만에 육성응원을 했다. 결과가 따라주지 못해 슬펐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참 행복했다.
최유정씨가 2021년 5월19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2021 KBO리그 기아 타이거즈와 에스에스지(SSG) 랜더스의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육성응원이 금지돼 스케치북에 글을 적어 응원하고 있다. 중계화면 갈무리
코로나 영향으로 취식과 육성응원이 금지되면서, 그간 야구 인기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제재들이 풀리면서 많은 팬이 야구장으로 돌아오고 있고, 신규 팬 유입도 늘어나면서 야구 인기가 다시 회복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주변에서도 오히려 요즘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저씨, 삼촌 같던 선수들이 어느덧 오빠, 동갑내기가 되고 이제는 나보다 어린 선수들이 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나 팬 마음으로 응원도 한다. 내 인생 절반을 함께한 야구. 미치도록 사랑하는 기아 타이거즈. 그동안 많은 즐거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20대 친구분들. 이미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어느 팀을 응원하든 같은 야구팬으로서 반가울 것 같아요. 우리 오래오래 함께 한국 야구를 응원해요. 아직 야구의 재미를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야구장에 가보길 추천할게요. 우연히 간 야구장에서, 운명의 팀을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최유정(서울 노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