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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야구 이야기 8] 엄마도 사실은 ‘야구광’이란다

등록 2022-05-17 11:30수정 2022-05-18 02:33

윤혜경씨가 여름 휴가 중이던 2016년 8월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를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본인 제공
윤혜경씨가 여름 휴가 중이던 2016년 8월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를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본인 제공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한겨레〉 스포츠팀은 나와 너, 우리들의 야구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신의 ‘찐’한 야구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사연 보낼 곳>

hanibaseball@gmail.com 혹은 서울시 마포구 효창목길6 한겨레신문사 6층 스포츠팀.

와∼ 나의 야구 이야기를 할 기회가 드디어 왔구나!

1980년대 초.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야구를 처음 접했다. 땅끝 해남의 (누군가의 표현으로) 시골 촌구석이라 티브이(TV)는 없었고 라디오만 있던 시절. 우연히 라디오 야구 중계를 들으며 야구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신문 구독도 안 했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야구 중계 시간을 알게 됐는지 의문이지만, 당시 최고 인기였던 고교야구 중계를 거의 빼놓지 않고 들었다.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대통령기 등등…. 라디오를 끼고 살던 아버지도 야구 중계 때만은 양보하셨다.

부산고 선수들이 1985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광주상고를 꺾고 우승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고 선수들이 1985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광주상고를 꺾고 우승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름방학 땐 어머니 밭일을 도와야 했는데, 밭에 나갈 때면 라디오를 밭 가운데 두고 일을 했다. 소리가 안 들리면 이리저리 옮기며 야구 중계를 들었다. 딱히 응원하는 팀도, 좋아하는 선수도 없었다. 그저 야구가 좋았던 것 같다. 야구 경기 규칙과 용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와 야구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 써먹지를 못했다.

재밌는 건, 규칙은 알면서도 정작 야구장이 어찌 생겼는지는 몰랐다는 점이다. 라디오 속 소리뿐이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모습이 상상이 됐다.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해 가슴이 두근거렸고, 선수들이 땀 흘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땅끝마을에서 야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를 광주에 있는 여상으로 진학하면서, 나는 드디어 야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같은 학교법인 광주상고에 야구팀이 있어서, 쉬는 시간이면 울타리 넘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라디오로만 듣던 아쉬움을 달랬다. 야구 덕분에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절망에서도 벗어났다. 그때부터 선수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고, 그들의 모습이 담긴 책받침을 사기도 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박노준과 김건우 두 사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고교야구 전설이었던 박노준(현 안양대 총장)이 2010년 10월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자선경기에서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고교야구 전설이었던 박노준(현 안양대 총장)이 2010년 10월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자선경기에서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스무살이 돼 취업하고, 회사 직원들과 처음으로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았던 날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85년 여름쯤이었을까. 광주 무등경기장 주말 경기였는데, 남자 직원들이 주말에 야구장에 간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는 나도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남자 직원들은 “여자가 무슨 야구를 좋아하냐”면서도 못 이기는 척 같이 야구장에 갔다.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렜다. 라디오로만 듣던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니…. 37년 전이라 자세한 기억까지는 안 나지만, 그날 몇 시간이 정말 꿈만 같았다는 것은 또렷하다. 그 함성과 열기로 가슴이 한순간도 쉬지 않았던 것도 잊을 수 없다. 월요일 출근 날엔 남자 직원들이 나를 다시 보게 됐다. “아니, 야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면서…. 그 뒤로도 종종 남자 직원들 틈에 끼어 야구장을 찾았다.

퇴사하고 결혼을 한 뒤로는, 야구장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큰 맘 먹고 예매를 했지만, 하필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 다시 야구를 볼 기회가 찾아온 건, 셋째(아들) 덕분이었다. 2016년 여름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기로 했는데, 두산 베어스 팬인 아들이 다 같이 야구장을 가자고 제안한 덕이다. 그렇게 우리는 잠실야구장에서 야구를 봤고, 나는 엄마가 야구광이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해줬다.

윤혜경씨가 야구 티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본인 제공
윤혜경씨가 야구 티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본인 제공
엄마도 야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린 뒤로, 야구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요한 매개체가 됐다. 아들이 야구를 보고 있으면, 지나가면서 “두산이 이겼어?” 하곤 묻는다. 기아 타이거즈가 두산을 꺾는 날이면, 나는 “우리가 이겼다”고 아들에게 한마디를 한다. 반대로 두산이 기아를 꺾는 날이면, 아들이 “요즘 기아 왜 그러냐”고 핀잔을 준다. 이제는 야구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하지만 아들에게 두산과 기아의 승패를 묻고, 요즘 잘 나가는 선수를 물어보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지금도 스포츠 뉴스에 야구가 나오면 반갑고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어디인지 꼭 확인한다. 요즘 프로야구 인기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오래 전 야구팬으로서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하나 의무감도 생긴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절, 가끔 티브이로 무관중 경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스포츠든 연극이든, 관객과 호흡이 가장 중요한데 얼마나 외로울까. 선수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갈 수 있으면 야구장에 의무적으로라도 가줘야지 하는 마음도 생긴다.

나처럼 경기장을 열심히 못 가는 사람도, 한 번 야구를 접했고 좋아했던 사람이면 항상 야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선수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늘 멋지고 아름다우니까.

윤혜경(서울 광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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