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김치 담가 먹은 작은미미. 사진 작은미미 제공
지난주 김치냉장고 구석에서 묵은김치를 발견했다. 마치 천만년 묵은 공룡 뼈를 발굴한 마냥 환호를 질렀다. 지난해 엄마가 인도에서 담가 주고 간 김치였다. 겉은 하얀 곰팡이가 잔뜩 피었지만, 다행히 안쪽은 먹을 만했다. 딱히 김치 없이 밥 못 먹는 인간은 아니었는데, 4년간 인도 생활하는 동안 이토록 김치를 귀하게 여기게 될 줄은 몰랐다.
인도살이 1년차 일 때는 김치가 풍족했다. 호기롭게 주변에 퍼주기도 했다. 반년쯤 지나자 김치 기근이 시작됐다. 나는 큰 맘 먹고 김장에 도전했다.
인도에도 김장용 배추가 생산된다. 11월쯤 되면 한인 커뮤니티에 다양한 글이 올라온다. ‘어디 배추가 실하다. 어디 배추는 겉은 멀쩡한데 안이 다 썩어 있었다. 농약 냄새가 심하다.’ 나는 동네 친구와 배추를 10㎏씩 주문했다. 정보통인 친구는 당시 옆 동네에 숨은 김치의 고수가 산다고 알려줬다.
“그 왕언니가 몇 번 주물러(?) 주면 맛이 완전히 달라진대.” 김치에 관해 한 수 배우고자 우리는 왕언니를 알현하러 갔다. 그날 왕언니네 저녁 메뉴는 육개장이었다. 맨날 미역국, 된장찌개, 김치찌개만 먹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식당급 크기의 커다란 냄비에 심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며 콸콸 끓고 있던 육개장. 그날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어먹었다.
김치의 달인인 왕언니가 주물러준 덕분에 무사히 김장을 마쳤다. 인도 배추는 빨리 무르기 때문에 한국보다 절이는 시간을 줄여야 하고, 인도 고춧가루는 너무 맵기 때문에 비싸지만 달곰한 한국 고춧가루를 구해 쓰는 게 낫다. 언니는 여러 집으로 김치 출장을 다니며 수많은 한국인의 김치를 업그레이드해주었다.
왕언니는 그 뒤 먼 곳으로 이사를 했고, 나는 주로 간단한 버전의 김치를 해 먹었다. 겉절이, 깍두기, 오이소박이, 파김치 등을 말이다. 친구가 알려준 토마토 김치와 고수김치도 별미다. 나보다는 남편이 더 많이 먹고 손맛도 좋다. 인도에서 김치 담당은 남편이다. 한번은 김치의 속에 망고를 넣기에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의외로 달짝지근한 것이 입에 잘 붙었다. 김치에 홍시를 넣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것 같다.
인도에서 김치 담가 먹은 작은미미. 사진 작은미미 제공
인도에도 ‘아차르’, 일명 ‘인도 피클’이라고 부르는 저장 음식이 있다. 고추, 라임, 망고 등을 절이고 발효해 만든 음식이다. 망고 피클이라니, 얼마나 상큼한 이름인가. 그러나 망고 피클을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가는 맵고 짭조름한 마살라(인도 향신료) 공격을 당할 것이다. 인도 스타일의 피클은 일본의 우메보시같이 아주 조금씩 떼어먹는 반찬이다. 인도 사람들에게 김치는 어떤 맛일까?
인도 친구들에게 김치를 아느냐고 종종 물었다. 아쉽게도 아직 김치는 인도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식은 아니다. 인도 친구에게 신 김치를 준 적 있는데, 그는 더 주겠다는 나의 제안에 거듭 손을 휘저었다.
종종 인도 마트에서 독일 양배추 피클 ‘사우어크라우트’와 나란히 서 있는 ‘김치 샐러드’를 목격한다. 호기심에 사보았는데 매콤한 배추 피클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에 간 세련된 카페 메뉴판에 ‘콜드 김치 누들 샐러드’가 있었다. 김치 비빔면에 크루아상과 버섯 크레이프 등과 함께 올라온 것이 재미있었다.
인도인들이 김치를 샐러드로 여기는 이유는 김치에 들어간 생선 액젓 때문이다. 워낙 채식주의자가 많으니 액젓 없이 고춧가루 양념만으로 만든 김치는 샐러드로 여기는 듯하다. 김치를 포함한 한국 음식은 인도에서 여전히 이국적인 음식이지만 슬슬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고 있다.
큰미미가 대학 시절 무대에 올렸던 ‘가장 맛있는 아침’이라는 연극이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남기고 간 마지막 김치에 관한 이야기였다. 연극 속 뭉클했던 한 장면이 십여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얼마나 살림에 관심이 없었으면 이제야 그걸 발견했냐며 혀를 끌끌 찬다. 엄마의 핀잔을 뒤로하고 나는 인도에서의 마지막 김치를 꺼내 쫑쫑 썰었다.
작은미미(미미시스터즈·뮤지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