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18일 인도 10대 소녀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인도 여성들. AP 연합뉴스
몇 년 전 델리에서 친구와 헤어진 뒤 오토릭샤(오토바이를 택시로 개조한 것·일명 뚝뚝이)를 탄 적 있다. 기사와 가격을 미리 흥정하고 10분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꺼내둔 돈을 기사에게 내미는데 갑자기 그가 내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유 키스 미 앤드 유 머니 노니드.(나한테 뽀뽀해주면 릭샤비 공짜야)”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와 방심한 사이, 기사가 몸을 기대며 내 얼굴을 꽉 잡았다. 나는 기사를 퍽 밀치며 한국말로 온갖 쌍욕을 퍼부었다. 기사는 잠깐 머쓱해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피프티 루피즈.(50루피)”
날은 어두웠지만, 번화가였기에 내가 방심했던 것일까. 홧김에 돈을 던지고 뒤돌아서는데 그동안 들었던 델리의 악명 높은 강간 사건들이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이 겪은 경험담만 해도 차고 넘친다. 골프 치러 갔던 한 동양인 여성이 캐디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이야기, 헤어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성추행당한 친구 경험담 등. 그뿐인가! 잊을 만하면 오는 성희롱성 디엠들도 문제다. 치근덕거림은 일상이다.
그 오토릭샤에는 그가 모시는 것 같은 수많은 여신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여신을 모시는 주제에 막상 현실 속 여자들은 왜 막 대하는 것일까? 물론 델리의 모든 남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을 존중하며 가정적인 남자도 많다.
인도의 고대 마누 법전에는 여성을 ‘오염 가능성이 있는 열등한 존재’로 명시하고 있다. 심지어 남성은 자신보다 낮은 카스트의 여성은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는, 성폭행에 대한 충격적인 명분까지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2013년 델리 버스 성폭행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사건만큼이나 인도 정부의 남성 인사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길거리에 사탕이 떨어져 있으면 개도 주워 먹는다. 그러니까 밤에 밖에 돌아다니지 마라.” “성폭행의 90% 이상이 동의하에 일어난다.” “청바지 입지 마라, 청바지는 남자들의 본성을 깨운다.” “육식은 사람을 동물로 만든다. 고기 먹지 마라.” 가해자들은 올해 사형집행을 했다.
이런 곳에서 사는 델리 여성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하지만 순결하고 정숙하고 남편의 모든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는 인도의 전통적인 여성관은 이제 깨지는 중이다. 본인의 성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동의 없는 관계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비혼주의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을 펼치는 단체도 많다. 정기적으로 ‘플래시 몹’을 벌이는 단체나 호신용 후추 스프레이를 나눠주는 단체도 있다. 남자들의 참여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리나도 그런 여성 중 한 명이다. 인도의 전통 의상을 캐주얼하게 디자인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이리나는 인도 동부 콜카타 출신이다. 이리나는 “델리에 살기가 어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여자로 살기에 너무 불안전한 동네야.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기만 해도 남자들이 성희롱해. 그냥 여자를 아주 만만하게 봐.” 나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콜카타는 어때?” “물론 문제가 없진 않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델리와 완전히 달라. 밤늦게 다녀도 안전해. 콜카타 남자들은 훨씬 덜 가부장적이야.”
나는 인도 동북부 메갈라야 지역의 카시족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선 드물게 모계 중심사회다. 가장 어린 딸이 재산을 상속하는 사회다. 여자들이 모든 대소사를 결정하고 살림과 육아까지 하는 반면 그곳 남자들의 존재감은 매우 약하다. 심지어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카시족 여성을 인터뷰 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지역 남자들은 너무 약해서 매력이 없어요. 가부장적인 인도 본토 남자들도 싫고요.”
불균형은 결국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 위태로운 균형이라도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파이팅을 보낸다.
작은미미(미미시스터즈 멤버·뮤지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