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봉쇄령으로 때아닌 ‘특별 독서 주간’이 시작됐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여성 전용 칸>, <82년생 김지영> 영문판, <베샤람>. 사진 작은미미 제공
분명 인도 하늘 아래 살고 있는데, 인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네 번이나 연장된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령. 문득 인도가, 인도 사람들이 보고 싶다. 릭샤의 고막 찢는 경적 소리가, 무질서한 새치기가, 남 참견하기 좋아하는 인도 사람들의 수다가 그립다. 매일 가던 서점도, 같이 농땡이 부리던 무리도 그립다. 200루피(한화로 3200원)짜리 로컬 영화관도, 코딱지만 한 재즈 클럽도, 인도 사람들의 체취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 발리우드 클럽도 그립다. 하물며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목격하던 노상 방뇨까지 그립다.
최근 알게 된 ‘비벡 테주자’라는 젊은 작가가 있다. <인도에서 게이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에세이를 펴낸 그는 보수적인 인도 사회에 커밍아웃한 작가이자 서평가다. 그는 에스엔에스에 인도 여성 작가들이 추천한 책 목록을 올렸는데, 인도 향수병에 걸린 나에게는 극약 처방 같은 것이었다. 때마침 책 배송 서비스를 시작한 동네 서점 ‘바흐리손스 북셀러’에 목록 중 관심 가는 몇 권을 주문했다. 그렇게 봉쇄령 특별 독서 주간이 시작되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작가와 책들을 소개 올릴까 한다.
한국에는 번역된 적이 없지만, 인도에서는 스무권 넘는 소설을 발표한 중견 여성 작가 ‘아니타 네어’.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박완서 작가가 떠오른다. 그의 글은 담담하고 침착하다. 옆집 언니 같은 이의 속 깊은 인생사를 듣는 듯하다. <여성 전용 칸>은 인도 남부 카냐쿠마리로 향하는 기차의 여성 전용 칸이 배경이다. 우연히 같은 칸에서 만난 여섯명의 인도 여자 이야기다. 나이, 계급, 처한 상황도 다르고 심지어 서로 초면인 이들이다. 어차피 하룻밤만 볼 사이라서 그런지, 그들은 각자 살아온 삶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읽는 내내 덜컹거리는 기차 창에 기대 끝없이 조잘거리는 인도 여자를 보는 듯 했다. 그중 한명인 채식주의자가 난생처음 계란을 까서 맛보는 장면은 어떤 베드신보다 에로틱했다.
그의 다른 소설 <말벌 삼키기>에는 무려 여자 10명이 등장한다. 자살한 여자의 작은 뼛조각이 화자인데, 그 뼛조각은 인도 여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그네들의 삶의 한 구석을 엿보게 해준다. 인도 여자의 삶을 간접 체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생경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 대단히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도든, 한국이든 가까이 들여다보면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새는 국적을 초월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인도는 자극적인 기사를 통해 낯설고 이상한 사람들의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그게 다가 아닌데’라고 아쉬워하며 다른 책을 집었다. 작가 ‘프리야 알리카 엘리아스’의 에세이 <베샤람>이다. ‘베샤람’이란 힌디어로 ‘뻔뻔한·음탕한’ 등의 의미로 주로 여성에게 쓰는 단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단어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원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여성’이라고 다시 정의한다. 가부장적인 인도 사회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책이랄까. 섹스, 데이트 폭력, 성교육, 성폭행 등 보수적인 인도에서 금기로 여기는 주제에 대해 자신과 주변인의 경험을 토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 책의 대범함에 나는 조금 놀랐고 통쾌했다. 악명 높은 인도의 성폭행에 대해서는 인도 고대 설화나 마누 법전을 인용하며 뿌리 깊은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합의하지 않은 자신의 섹스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상담도 해준다. 처참한 이별 뒤에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그런 그의 글에서 나는 몇 년 뒤 ‘미미 시스터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레즈비언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낸 파격적인 책도 눈에 띄었다. 신간 코너에 반가운 이름도 발견했다. <82년생 김지영> 영문판이었다. <채식주의자> 이후에 오랜만에 발견한 한국 소설이었다. 서점 한쪽을 늘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사진집만큼이나 한국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한국이 그리워진다.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
작은미미(미미 시스터즈 멤버·뮤지션·작가)